3. 불운의 왕 사울
부유한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은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9장).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숩(Zuph) 땅의 마을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우연히 그 마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울을 만나 몇 가지 예언과 지시사항을 일러줍니다. 그 뒤에 사무엘은 미스바에 사람들을 모으고 제비를 뽑아 짐 가운데 몸을 숨기고 있던 사울을 왕으로 삼지만(삼상 10:17-25), 사울이 왕이 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무리들은 불만을 표출합니다.
통일 왕국 시대에 대한 추정 연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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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00 1070 1050 1040 1030 1028 1012 1010 1003 970 930 |
사무엘 탄생? 사울의 탄생? 요나단의 탄생? 다윗의 탄생? 사울 통치의 시작? 다윗이 기름부음 받음? 사무엘의 죽음? 사울의 죽음, 다윗의 헤브론 통치의 시작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의 됨 다윗의 죽음, 솔로몬의 단독 통치의 시작 솔로몬의 죽음 |
이안 프로반 외 2명,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김구원 역 (CLC, 2013), 409. |
사울은 블레셋의 군사 위협의 상황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사울 이전에도 여러 ‘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어떤 공식적인 문서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어쩌면 성서에서 사울 왕 선택에 대한 전승 3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각기 다른 왕에 대한 기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다가 사무엘을 만나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삼상9:3-10:16)
- 사무엘이 왕을 선택하기 위해 미스바에서 제비를 뽑을 때 사울이 짐짝 뒤에 숨다(삼상10:17-27)
- 가장 믿을 만한 전승으로서, 이스라엘 군대의 우두머리인 사울은 야베스 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냈고, 사람들은 사무엘의 동의 아래 길갈에서 사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삼상11:15).
이 각각의 기록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고 사울의 주요 임무는 블레셋과의 해방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믹마스 전투에서 사울은 첫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안겨 줍니다(삼상 13:5-14:46).
사울은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불러 모았습니다(삼상 14:52). 사울의 전쟁 전략은 매복과 적진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기에 많은 군인 수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사울은 기브아 근처에서 군사 약 600명가량을 데리고 있었습니다(삼상14:2). 성서의 기록은 블레셋과의 전쟁의 세부사항에 대해선 간략한 암시만을 주는데 사울은 블레셋을 이스라엘 중심에서 몰아낸 것 같습니다. 블레셋이 남쪽 유다를 공격할 때 다윗이 나타나 골리앗을 이깁니다(삼상17장). 평지보다 산간지방에서의 전투에 강했던 사울은 길보아산 근처 평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사합니다(삼상31:1-7, 삼하1:6-10).
사울은 블레셋 전쟁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사람들과 소바의 왕과 아말렉인들과의 전쟁 기록이 나옵니다(삼상14: 47,8). 아말렉과의 전투(삼상 15장)에서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부하들에게 아말렉 사람과 그들의 가축을 모두 ‘진멸’(히브리어 ‘헤렘’)하라고 명령합니다(삼상 15:3-9). 그러나 사울은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아각 왕과 가장 좋은 가축들을 살려두며 이는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사울과 아말렉의 전투에서 헤렘을 어긴 이유로 사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삼상 15:17-23), 다윗과 아말렉의 전투에서 헤렘을 어긴 다윗은 더욱 성공하는 계기가 됩니다(삼상 30장).
사울은 몇 년 동안 통치했는가?
사무엘상 13:1은 히브리어 본문이 명확하지 않아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개역개정/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새번역/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마흔두 해였다.
공동번역/ 번역 없음
NIV/ Saul was thirty years old(30세) t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over Israel forty-two years(42년)
KJV/ Saul reigned one year(1세); and when he had reigned two years over Israel(2년)
사무엘상 13:1의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는 해의 아들<한 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을 2년간 다스렸다’라고 되어있기에 명확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숫자가 없거나 사라졌습니다.
NIV의 해석은 70인역의 일부 사본을 따라 사울이 즉위한 때가 30세라고 번역하는데 이것도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13:21과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울은 40년간 다스립니다.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사울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름부음 받는 사건(삼상 10:6)으로부터 왕으로 확정된 때(삼상 11:15-13:1)까지 1년이 지났고, 사울이 왕으로 확증된 때로부터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때까지 2년이 지났다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2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을 수정하여 22년 동안 통치한 것으로 읽기도 하는데, 따라서 사울의 연대는 잠정적입니다.
블레셋의 위협
블레셋(Philistine)은 이집트 명문들에 해양 민족들 중 하나로 구약성경에서 300번 가까이 등장합니다. 3 성경의 묘사로부터 파생된 뜻으로 현대 영어에서 ‘philistine’은 ‘속물’ 이나 ‘교양 없는’ 것을 뜻합니다. 블레셋은 다른 해양 민족들이 그런 것처럼 결코 바다나 섬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블레셋은 바다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에게(Aegean, 서쪽의 그리스 반도와 동쪽의 소아시아 및 크레타 섬 사이에 있는 지중해의 지역) 지방이나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지방) 남부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블레셋은 철기문화를 가진 강력한 민족이었습니다. 블레셋 말고도 체커(Tjekkar), 셰클레슈(Sheklesh), 다눈나(Danuna), 웨셰슈(Weshesh) 등과 같은 해양 민족들이 있습니다. 해양 민족들은 기원전 12세기 초에 시리아-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수많은 도시를 파괴했고, 심지어 이집트를 점령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람세스 3세 통치 8년(기원전 1177년경)에 저지되었으며 이 전투는 테베에 있는 람세스 3세의 메디네트 하부(Medinet Habu) 신사의 벽에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을 성경의 블레셋과 일치시킵니다.
해양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가사(Gaza)와 야파(Jaffa) 사이의 해안 평원을 차지하고, 체케는 돌(Dor) 근방의 샤론 평원을 차지합니다. 4그리고 그렛 사람들(삼상 30:14, Kerethites, 크레타 사람들?) 역시 해양 민족이었던 것 같은데 이들은 그렛 사람의 네겝(Negev, 개역개정에는 ‘남방’)이라 불리는 곳에 정착합니다(삼상30:14). 블레셋의 도시 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등 5도시 연맹으로 조직되었으며 각 도시는 ‘방백’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수13:3, 삿16:5, 8, 23, 27; 삼상5:8-11). 나중에 블레셋이 아벡(Aphek) 근처까지 군사적으로 확장하게 되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협합니다.
블레셋의 발달된 군사 장비는 기원전 12세기경의 지배적 금속인 청동과 철로 만든 무기였습니다(삼상 13:19-21). 에벤에셀의 첫 전투에서 블레셋은 이스라엘 군사 4천 명을 죽였고(삼상 4:2), 두 번째 전투에서 언약궤와 에브라임 산지 일부도 점령합니다. 블레셋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산간 지방에 수비대(또는 총독들)를 두었는데, 가장 중요한 수비대는 게바에 있었습니다(삼상13:3-5).
사울 시대의 고고학
사울의 왕권에 대한 고고학 기록은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산지와 이즈벳 사르타와 같은 유적지에서는 농경지, 작은 촌락, 노천 예배소 등을 드러낼 뿐입니다. 남쪽으로 유다 북부에는 정착촌이 훨씬 더 드문드문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북동부의 요새인 키르베트 엣-다와라에는 아마 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을 텐데, 이는 사울의 왕국에서는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 이전 시대의 주요한 이스라엘 유적인 실로는 기원전 11세기 중반쯤에 큰 불로 불타버린 것 같습니다. 이 파괴는 블레셋이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찌르고(삼상 4장)난 뒤에 있었던 후속 공격의 결과물 일수 있습니다.
고고학은 제1철기시대 말인 기원전 11세기경 중앙 집중 조직과 행정이 없는 기본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의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최근 인구 추산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 말에 요단강 서쪽에 5만 명 정도의 인구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기원전 11세기 블레셋의 도시 문명인 아스돗, 텔 게리사, 텔 미크네(성서의 에그론), 아스글론은 번창했습니다. 5
사울의 통치 시기의 이스라엘에는 철공이 없었고, 보습, 삽, 도끼, 괭이 등은 블레셋을 통해 구입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만이 칼과 창을 소유했었다는 성서 이야기는(삼상13:19-22) 고고학의 자료로 뒷받침됩니다.
기원전 11세기로 추정되는 철로 만든 쟁기 끝들이 기브아(텔 엘 풀, Tell el-Ful)에서 발견되었고 텔 제메, 벧산, 텔 엔 나스베에서는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되는 철로 만든 보습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철기 시대의 유물은 12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가 4배, 10세기로 넘어가 2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6
사울의 넷째 아들인 에스바알(‘바알의 사람’, 대상 8:33)의 이름에서 보듯이 사울 시대에 바알과 야훼는 상당히 혼합적으로 숭배되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7
사울의 재평가
왕국시대 이전의 사무엘과 사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8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사울도 카리스마를 받음으로써 지도자로서의 영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지파 동맹 전체의 지도자로서 인정되었는데, 세습이나 혁명이 아니라 야훼의 영이 그에게 내려서 암몬의 침입으로부터 야베스 길르앗을 구했기 때문입니다(삼사 11:6-7).
사울은 왕(히브리어 ‘멜렉’)이 아니라 영도자(히브리어 ‘나기드’)로 불립니다(삼상 9:16; 10:1). 다윗이나 솔로몬과는 달리 사울은 이스라엘의 부족 구조를 중앙 집권적 체제로 바꾸지 않고, 세금을 부과하거나 상비군을 두지도 않고 왕궁을 건설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거느린 군사는 약간의 무리였을 뿐입니다(삼상 13:2; 14:52). 기브아에서의 사울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사울은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야훼에게 성실하고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야기들은 신앙에 따라서 행동하고, 형세가 절망적일 때도 야훼를 신뢰했으며 그 결과까지도 감수하는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정치적인 지도자인 왕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사령관에 가까웠습니다.
사울의 통치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균형 잡힌 평가가 어렵습니다. 다윗의 승리와 다윗 왕조의 관점에서 역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대조를 이루는 전형적인 악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삼상16장-27장의 주제). 이것은 다윗의 동료나 제사장 아비아달이나 또는 그의 가까운 사람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질투심이 심한 자로 묘사됩니다.
역대상 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제사를 드리거나(삼상 13:8-14),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나는 이야기(사무엘상 28:7) 등을 통해 그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부각 시킵니다. 하지만 솔로몬도 성전을 드리 뒤에 제사를 드리고, 다윗은 밧세바 사건 등을 통해 훨씬 큰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권은 유지됩니다.
여러 차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다’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삼상 17:37; 18:12, 14, 28; 20:13; 삼하 5:10). 다윗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와 반대로 사울의 평가는 삼상 16:14의 ‘야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와 같이 비극적입니다.다윗은 모든 것에서 성공하고(삼상 26:25) 사울이 시도한 것들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야기는 신학적 해석의 의하여 지지되는 정치적 관점을 선전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9 10
- Robert B. Coote, 「초기 이스라엘 이해의 새로운 지평」, 정희원 역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2011), 176. [본문으로]
- Iain Provan, et al.,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김구원 역 (서울: CLC, 2013), 406. [본문으로]
- Alfred J. Hoerth et al., 「고대 근동 문화」, 신득일, 김백석 역 (서울: CLC, 2012), 333. [본문으로]
- Hershel Shanks et. al., 「고대이스라엘」, 김유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155. [본문으로]
- Hershel Shanks et. al., 「고대이스라엘」, 김유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163. [본문으로]
- Phillp J. King, Lawerence E. Stager, 「고대 이스라엘 문화」 (서울: CLC, 2016), 144. [본문으로]
- Robert B. Coote, 「초기 이스라엘 이해의 새로운 지평」, 정희원 역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2011), 177. [본문으로]
- Bernhard W. Anderson, 「구약성서 이해」,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267. [본문으로]
- Kyle McCater, Jr, "The Apology of David", 266-267. Gray N. Knoppers and McConville, J. Gordon eds. Reconsidering Israel and Judah: Recent Studies o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Indiana: Winona Lake, 2000) [본문으로]
-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에 관해서는Robert P. Gordon, "David's Rise and Saul's Demise"를 참고하라. 고든은 왕위 계승 이야기를 성서 이야기와 역사, 문학과 관련된 모든 수단을 통해 분석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