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고니아 2020. 6. 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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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유대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과 기원전 167-165년의 박해와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파괴를 통한 생존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의 기록은 이제 단지 과거의 기록일 뿐일까? 두 가지 측면에서 포로의 경험은 여전히 현실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가 존속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안의 유대인들보다 많았습니다.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외세에 의해 지배를 받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제2성전 시대의 후반부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70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어서 132-135년에 바르 코흐바의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유대인 접근 금지 구역이 되고 유대인들은 성전 없는 신앙을 찾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뒤를 이어 종교 지도자가 된 랍비들의 활동 중심지는 얌니아(Jamnia), 다음에는 갈릴리로 이동했습니다. 대략 기원전 200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새로운 문학이 탄생합니다. 이는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라고 부르는 것으로 묵시(apocalypse)는 드러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묵시문학은 구약의 예언서의 직접적인 후계자는 아니지만 예언서의 좋은 주제들을 상당히 많이 가져왔습니다.[각주:1] 묵시문학의 저자들이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예언서와 비슷합니다.

묵시문학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논란중이고 심지어 묵시라고 불리는 것의 정의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문학적 기준에 따른 유대의 묵시문학(기원전 250-기원후 150)[각주:2]

천문서(天文書, 1에녹서 72-82)

(에디오피아어로 된) 1에녹서 1-36

다니엘 7-12

꿈 환상 또는 동물 묵시(1에녹서 83-90)

희년서 23

(12족장의 유언이 들어있는) 레위의 유언

스바냐의 묵시

에녹의 비유(1에녹서 37-71)

(슬라브어로 된) 2에녹서

에스드라2(에스드라4서 또는 에스라 묵시)

(시리아어로 된) 2바룩서

아브라함의 유언 10-15(A)8-12(B)

아브라함의 묵시

(그리스어로 된) 3바룩서

기원전 250년경

175년 이전

164

164-160

167-140

137-107

기원전100-기원후 70

기원전50-기원후 50

기원후 1-100

100-120

100-120

75-125

70-150

70-150

 

 

묵시문학은 그리스-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쓰인 것이기에 당연히 당시의 사상과 종교를 반영하는데 곧 지혜 전승의 자료 그리고 아마도 조로아스터교와 헬레니즘의 영향입니다. 그렇지만 페르시아 시대의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이 유대의 묵시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문제의 소지가 많은데 그 이유는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의 연대추정이 유대 묵시 문학의 연대추정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기 때문이며, 또한 유대의 묵시관이 세계의 파국을 예견하는 것과는 달리 조로아스터교의 윤리적 이원론은 역사 안에서의 삶에 대하여 세계 긍정적이며, 승리 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각주:3] 그것들은 매우 학문적인 작품이며, 그 안에는 매우 다양한 전승적 지식들이 들어있습니다. 각 작품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상당히 다른 차이를 보입니다.

 

묵시문학을 쓴 이들은 예언자와 같이 신적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같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서와는 달리,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환상을 묘사하는 양식으로 드러냅니다. 에스겔서와 스가랴서는 아마도 묵시문학이 지닌 이런 특징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처럼 작품 안에서 환상을 해결하는 해설가를 동반합니다(8:15-26; 10-11). 왜냐하면 묵시 문학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글을 읽은 이들이 환상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관심을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적 시간들로(가령, 에녹185-90; 바룩253-74) 또는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로(에녹193; 91:12-17; 모세의 유언 2-10)확장시킵니다. 역사는 우주적 범위를 갖는데 마치 하늘과 지옥 그리고 땅을 아우르는 선과 악의 전쟁처럼 그렇습니다.[각주:4]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던 다가올 심판은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의 대규모 전쟁으로 확장됩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승리를 거두고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구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은 더는 심판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방 국가들과 유대인 가운데 배교자들에게는 그러한 심판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대규모 전쟁에서 하나님은 곡(Gog)과 마곡(Magog)의 지휘 아래 연합한 이방 국가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38-39).

 

이렇듯 묵시문학은 최후의 심판이 전쟁이라는 형태로 진행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자들의 관심은 묵시문학에서도 계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강조는 예언서와는 달리 막연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따르면 시련의 시기는 곧 끝날 것입니다. 바룩220:1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서는 2장과 7장에서 전 세계의 역사를 4등분 합니다. 에녹183-90장의 주의 묵시에서는 역사를 서로 다른 길이의 ‘10로 나누고 각각은 중요한 사건들로 표시됩니다. 아브라함의 유언에서는 역사가 7등분되는 반면에, 아브라함의 묵시, 2에스드라서, 바룩2서는 12라는 숫자를 선호합니다. 각각의 경우에서 독자들은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눈앞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포로에 대한 예언자적 초점은 묵시문학의 역사 서술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보통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사건은 하나의 주요한 전환점으로 등장하며 회복에 대한 기간은 저마다 다릅니다.

 

묵시자들

묵시자들은 누구였을까? 묵시문학은 장르 요소들과 개념적 요소들의 복합물이며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산출물인 것으로 보아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 혼합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포로의 경험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든 묵시 문학가는 익명(匿名)이지만 그들은 모세, 아브라함과 같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내세웠습니다. 또 다른 작품들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포로기 당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니엘,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바룩2, 3서는 묵시문학이다), 에스라(2에스드라서 또는 에스라4), 다니엘 9장은 예루살렘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기도가 포함됩니다. 이는 표면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인 기원전 587년이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2세기 안티오쿠스 4세의 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룩2서와 제2에스드라서는 587년의 상황에 탄식하지만 실제로는 서기 70년의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을 다룹니다.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세계의 흐름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환상 체험이나 학문 작업을 통해 백성이 겪은 고통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며 조만간 역사 가운데 의미 있는 종지부를 찍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묵시문학의 저자들에게는 당시의 상황은 예언자들 때와 달리 작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의 세력은 너무 강해졌으며 그렇기에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토비트 14: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자비를 베푸시고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시고 성전도 재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는

그 성전을 예전 것만큼 훌륭하게는 짓지 못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을 찬란하게 재건할 것이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하느님의 성전도 그 곳에 세울 것입니다.


 

  1. Donald E. Gowan, 「구약 예언서 신학」, 차준희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450. [본문으로]
  2. Norman K. Gottwald, 「히브리 성서 2」, 김상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279. [본문으로]
  3. Norman K. Gottwald, 「히브리 성서 2」, 김상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280. [본문으로]
  4. Donald E. Gowan, 「구약 예언서 신학」, 차준희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45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