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성서고고학의 시작
성서고고학의 시작
고고학은 성서의 집필과 역사적인 신빙성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성서가 비교적 후대에 쓰였으며 내용의 대부분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과격한 비평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고고학의 초기 임무였습니다.
성서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현대적인 탐사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일련의 획기적인 발견과 수십 년에 걸쳐서 꾸준히 진행된 고고학 발굴과 해석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대다수 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이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성서 원본이 그 속에 묘사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문서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신뢰할 만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1838년,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 당시 하버드대학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엔도버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아랍어를 잘하는 선교사 엘리 스미스(Eli Smith)와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지역의 위치를 실제 발견하여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185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탐사했습니다. 성서를 바탕으로 나침반, 망원경, 줄자 등 초보적인 도구들만 이용하였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 지명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로빈슨은 과거에 잊힌 성서의 지명들을 실제로 찾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로빈슨과 이후의 발굴자들은 성서 속의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비교 분석하면서 예루살렘, 헤브론, 얍바, 벧스안, 므깃도, 하솔, 라기스 등 수십 개의 성경의 지명들을 확인해 나갔습니다.
1865년, 이들의 조사가 많은 성과를 얻어내자 영국의 ‘왕립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은 고도로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서 지명 확인 작업을 추진하여 북쪽 요르단 강의 여러 발원지에서부터 남쪽의 네게브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의 세밀한 지형 지도를 작성했습니다. 이러한 지도를 바탕으로 자연환경과 지형조건이 성경 기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1867년, 프랑스 영사관의 일원인 찰스 클레르몽 가노(Charles Clermont Ganneau)는 요르단의 디본(Dibon)에서 기원전 9세기경의 메사 비문(모압 석비)을 확인합니다. 1 고대 요르단 왕국의 땅에서 19세기에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승전비문’은 메사가 이스라엘 군대에게 거둔 승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열왕기하 3:4-27). 또한 그는 1880년에 발견된 실로암 연못으로 알려진 기혼샘의 비문을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줍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아시리아의 침략에 대비해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샘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공사를 한 이야기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왕하 20:20).
고고학의 발굴과 발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의 표준적인 연대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노력은 성서 본문에 바탕을 두었으며 성경 속에 기록된 인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에는 성서 이외의 자료도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진정한’ 성서 고고학자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첫 번째 사람은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일 것입니다. 그는 시대별로 상이한 여러 누적된 토양층들을 체계적으로 발굴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의 발굴팀은 기념 건축물과 귀중한 상형문자 명문이 방대하게 보존되어 있던 이집트를 집중적으로 탐사해서 기원전 1207년에 파라오 메르넵타(Merneptah)가 세운 승전 기념비를 발굴했습니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여러 민족들에게 거둔 대규모 승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서가 아닌 외부 자료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한 최초의 자료입니다. 그보다 조금 후대의 파라오인 시삭(열왕기상 14:25)은 22왕조의 셰숑크 1세로 확인되었으며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시삭(셰숑크 1세)은 기원전 945년부터 924년까지 왕위에 머물렀으며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전 벽에 이 원정 내용을 기록해놓았습니다.
18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나중에 미국과 독일이 가세한 학술발굴단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와 궁전, 설형 문자 등을 발굴해냈습니다. 이 제국들의 미술가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 시대의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왕들인 오므리, 아합, 예후와 남유다의 히스기야, 므낫세 왕이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서판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서 이외의 자료를 통해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를 더욱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주위 여러 나라들의 통치시대를 비교분석한 결과 대단히 정확한 통치 연대가 작성되었습니다.
1914년에 ‘팔레스타인 탐사기금’은 T. E. 로렌스(T. E. Lawrence)를 고용하여 남부 팔레스타인을 조사합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의 고고학자로서 레바논의 비블로스와 북부 시리아의 갈그미스 그리고 페트리와 함께 이집트 발굴작업에 참여합니다.
올브라이트와 성서 고고학
20세기 초반 20여 년 동안은 고고학의 황금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영국, 독일인들이 각각 팀을 만들어 사마리아, 게젤, 므깃도 등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인 학자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가 20세기 초에 개척한 성서 고고학은 대형 언덕(텔, tell)의 발굴에 주력했습니다. ‘성서 고고학’이라는 낱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32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였습니다.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올브라이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분석가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자입니다. 유럽 학자들의 비판적인 시각과는 달리 그는 성서와 고고학 자료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성서를 더욱 역사적인 문서로 확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제자인 조지 어니스트 라이트가 뒤이어 고고학을 발전시켜 1955-70년대에 성서 고고학의 전성기를 만듭니다. 올브라이트-라이트-브라이트로 이어지는 올브라이트 학파는 고고학을 성서학의 일부로 인식하여 성서 본문과 고대 근동학의 모든 측면들을 연결시켰으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무리하게 그 둘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자 고고학자들의 시각에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심지어 올브라이트의 제자들까지도 스승의 주장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브라이트와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열심에 치중한 나머지 때때로 고고학 결과물을 편협하고 배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기 성서 고고학자들은 전문적인 고고학 기술(발굴 방법, 분류, 분석 등)이 부족하였으며 성경에 지나치게 충실하다보니 발굴 조사 보고서의 객관성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및 근동 전체에서 밝혀진 사실과 성서에 기록된 본문 사이에 물질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고고학이 입증했습니다. 이는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밀해진 고고학 조사 방법으로 발굴과 조사가 진행되면서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의 기록 사이에 어긋나는 점도 상당부분 많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올브라이트 말년의 제자인 엘리이젤 오렌(Eliezer Oren)은 말하기를, 올브라이트는 말년에 거의 시력을 잃어 가면서도 새로운 발견과 학설에 의해 자신의 연구가 차츰차츰 수정되어가는 것에 대해 관대함과 겸허한 마음으로 얼마든지 수용했다고 합니다. 2
한손에는 성서를, 다른 손에는 삽을
성서 비평가들은 성서를 계속 해부하고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기에 성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와 달리 초기에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들은 고고학 자료를 팔레스타인 지역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독립적인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성서 기록에 계속 의존해서, 성서의 역사성을 확증하려는 의도로 고고학 자료를 조금은 무리하게 활용하였습니다. 모자이크 조각 모양이 조금 달라도 억지로 끼워맞췄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역사성을 확증하는데 좋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새로운 사조가 성서 고고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유물과 성서 원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게 됩니다. 성서의 땅에서 탐사 활동을 벌인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성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서 원본의 배경이 된 고대의 생활을 규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여러 고대 유적지를 발굴할 때 대상 유적지의 성경 관련 부분에만 역점을 두었던 관행은 사라졌습니다. 각종 동물의 뼈와 곡물의 씨앗, 토양 견본의 화학적인 분석, 세계의 수많은 문화에서 도출된 각종 장기적인 인류학적인 모델은 물론 발굴된 유물과 건축 및 정착 유형 등이 더욱 폭넓은 경제 변화, 정치 역사, 종교와 풍속, 인구 밀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서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협력 속에서 성서 속의 삶과 신앙과 이야기들이 더욱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