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겨울을 지내는 신앙
예측은 예측일 뿐이다
“우리는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죽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을 통해 온다. 축복은 가난을 통해 오고 부활은 죽음에서부터 온다.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이다.” (박형규 목사 글)
예측은 매력적입니다. 그것이 맞건 아니건 예측 신봉자가 있는 한 늘 장사가 되는 봉이 김선달의 강물이기 때문이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상하고 예측합니다. 사람의 운명처럼 과학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분야들음 뭇무속, 점성술, 타로 등 이른바 초자연적의 영역으로 미래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앞날은 ㅇ떻게 될까요. 겨울의 매서움을 온 몸으로 맞이하는 자연이ㅡ 피조물들은 연약합니다. 하지만 그드른 이겨냅니다. 죽은 듯 보이지만 그곳에서 생명이 봄의 꿈을 꿉니다. 내 신앙은 어떤가요. 누군가 나의 앞날,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이스라엘이 맞이한 겨울
과학은 좀더 정교하고 논닐적으로 보이는 수식으로 예측합니다. 체계저긴 예측 모형을 도우언하고 수준높은 수식과 그래프를 쓰지만 실체 예측은 늘 빗나갑니다 일기예보. 경제, 물가,
심지어 그것이 한 달 뒤의 허리케인이나 내년에 일어날 고비사막이 우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장 내읿람의 방향조차 맞히지 못하고 노벨상을 받은 블랙슐츠 옵션 가격을 예측할 것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그 수식을 개발한 사람은 파산에 이르러 버립니다. 기상청 체육대회날 비가 왔다는 뉴스
유전자 염기 서열을 분석하면 질병을 통제하고 사람의 수명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는 차에 치여 비명횡사할 수 있고, 술독에 빠져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할 수 도 있습니다.
우리의 앞날은 어떨까요?
맨몸으로 온 계절을 맞이하는 자연에는 조금 가혹한 이야기 같지만,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고, 여름은 여름답게 더워야 합니다. 그래야 곡식과 과일이 실한 열매를 맺고 생태계도 온전하게 보전이 됩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경종을 울리는 자연의 몸부림들이 세계 도처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순간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지나쳐 버립니다.
겨울도 역시 하나님의 지배아래에 있는 시간입니다.
스가랴 14장(1325쪽)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선지자 스가랴에 대해서는 스가랴 1-8장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며(스 5:1; 느 12:16), 학개와 동시대인이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까지 언급되는 것(1:1)을 볼 때, 이 글을 쓸 당시 그의 가족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스가랴가 예언을 시작한 때는 바사의 다리오 1세 히스타스페스(주전 522-486년) 통치 초, 주전 520년 11월(1:1 설명), 학개가 예언한 다음 두 달쯤 지나서였다. 학개처럼 그는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격려했다(스 4:24-5:2; 6:14).
12-14장은 예루살렘을 원수들에게서 구할 것이며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심판하고 성전을 정화할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묵시적 이미지로 기술하고 있다.
14장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여호와의 날이 다가온다. 재앙의 날이다.
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이것은 이스라엘이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전쟁이었다. 그들은 지도자 없이 고난을 받는다.
13:7-9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삼분의 이는 멸망할 것이다. 삼분의 일의 삶도 평탄하지 않다. 연단을 받는다. 은과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내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나를 치장하는 신앙의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겸손일 수도 있고,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것,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것 등등.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의 행위와 모습속에서 진정한 간절함이 담겨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 신앙 자체에 회의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게 전부인가? 내 신앙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겨울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 겨울은 우리의 진짜 신앙만 남게 합니다. 과장된 것, 포장된 것은 겨울을 통해 내 몸과 영혼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렇기 내 신앙의 속내를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계절은 겨울입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은 이파리로 숲의 속내를 가리고, 가장자리는 덩굴식물과 가시덤불로 막아 인간들의 출입을 금했던 숲은 겨울이 되면 그 속을 휑하니 보여 줍니다. 다른 계절에는 볼 수 없었던 산등성이 나목들의 선명한 모습, '하필이면 이 추운 겨울에 옷을 벗어버릴 것은 뭐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다른 계절에 옷을 벗는다면 더 볼썽사나울 것 같지만, 인간이 꽁꽁 껴입는 계절에 나무는 옷을 벗고, 숲은 속내를 다 보여 주고, 날짐승과 들짐승은 다른 계절보다 조금 더 두터운 털이나 깃털만으로 겨울을 납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도 있고, 썩은 나뭇잎에서 나오는 열기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곤충들도 있습니다. 밤새 죽은 듯 있다가 아침 햇살 한 줌에 서서히 몸을 깨우는 새들도 있습니다. 떠난 것들도 있지만, 겨울 숲 어딘가에도 여느 계절에 살던 이들이 어딘가에 몸을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예배당
숲에 사는 모두가 여느 계절보다 덜 모으고, 덜 쓰며 살아갑니다. 이파리를 떨어낸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멈추고 최소한의 물만으로 겨울을 납니다. 욕심껏 물을 마셨다가는 얼어 터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이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겨울에는 아주 조금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간격의 나이테를 가진 나무가 더 단단하고, 향이 더 깊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겨울이라는 고난의 계절을 견디어 낸 나무로부터 배웁니다.
숲에 사는 모두는 겨울이 오면 여느 계절보다 덜 모으고, 덜 쓰며 살아갈 뿐 아니라, 다른 계절에도 더불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숲은 그 안에 사는 모든 것들이 가장 검소하게 살아가는 계절인 겨울에 자기의 신앙의 속내를 다 보여 주면서 우리 인간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 보여 줘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신앙, 그리하여 겨울 신앙을 통해서 나무의 모양새도 산등성이의 모양도 보고, 여기저기 듬성듬성 박힌 바위도 보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덩굴 식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샘물이나 구불구불 계곡 길을 세세하게 보면서 '마음 좀 맑아져라' 하는 것이지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말이 언제나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욕심에 가득 차면, 그 사람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뻔하게 그 속내가 드러납니다. 오직 당사자만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눈보라 속에서 봄을 준비하다
겨울 숲의 끝자락을 잡고 봄이 올 것입니다. 나목에 수액이 돌 즈음, 나뭇가지가 연록의 싹을 내기 전에 작은 들풀들이 먼저 인사를 할 것입니다. 나목에서 이파리가 나기 전에 서둘러 피었다가 서둘러 가는 작은 봄꽃, 그들은 지금 한창 추운 겨울이지만 나무가 벗어 놓은 이파리 속에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뭇잎을 덮었던 눈이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뭇잎은 흙이 되고, 흙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자신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작은 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듯한 겨울 숲, 그러나 숲은 충만합니다. 속내를 다 보여 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숲, 나도 내 속내를 다 보여 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올해는 조금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 꼭 필요한 것만 몸에 지니고, 필요 이상으로 내 몸의 온도를 빼앗아가는 것을 내려놓고, 나를 바쁘게 내몰던 것을 미루어놓고 오롯이 주님만을 향하는 마음만 준비하십시오. 그것이 내 신앙의 알맹이가 겨울을 이겨내게 하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겨울은 나의 신앙의 맨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봄을 맞이하게 한다. 봄이면 파릇파릇 새 싹이 솟아난다. 생명이 요동친다. 그러나 진정으로 생명이 꿈틀꿈틀 대며 자라는 시기는 겨울이다. 겨울에 자랐기에 봄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살아날까? 겨울을 잘 이겨내고 남아 있을 것인가?
나는 어떠한가? 잘 이겨낼 수있을까?
예측을 해보면 암울할 수 있다. 그러나 겨울에도 우리의 신앙은 자라며 도리어 더 튼튼해진다.
14장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춥건 덥건 여호와의 은혜는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