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귀를 타다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20:29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여리고를 경유한 그의 여행에 관한 언급은 예수께서 갈리리를 떠나 요단 동편에 있는 페레아 지역을 지나서, 성경의 아둠밈 비탈(수 15:7) 가까이로이어지는 로마 시대의 도로를 따라서 순례 여행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리고에 있는 이전의 하스몬 왕궁들과 헤롯 왕궁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빛나는 왕궁들을 보았다.
비록 지금은 끝나버린 하스몬 왕조이지만 이전의 영광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서로 눈짓으로 생각을 교환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쪽으로 이끄신 것은 우리에게 유대민족의 부흥과 재건을 위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에 앞서 유대민족의 위대함과 사기를 불어넣기 위한 시찰이었다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예수님의 의도였을까?
21:1 벳바게-덜 익은 무화과의 집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예루살렘을 향해가는 가운데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이르렀다. 베다니와 벳바게는 예루살렘의 변두리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엇다. 특비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거룩한 도성의 바깥 경계지역이었다. 그곳의 이름(벳 바게)은 덜 익은 무화과 나무를 이르는 셈어 낱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람산(올리브산)도 지역 농산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2절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맞은 편 마을은 아마도 가까운 베다니엿을 것이다. 스가랴 14:4은 마지막 날이 이를 때에 여호와께서 감람산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감람산이 예수께서 승천하셨고 종말이 완전하게 이를 때 재림하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눅 24:50-51). (슥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1)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또는 즉시 돌려 보내리라 하라 하시니
아마도 예수님이 미리 준비를 하셨으리라
그는 겸손하여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사 62:11; 슥 9:9
사 62: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거주민을 나타낸다.
나귀는 멍에를 메는 동물이다. 메시아가 정복자의 백마를 타지 않고 멍에를 메는 나귀를 탔다는 것은 진정한 메시야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권세가 아닌 겸손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세에는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내러티브에서 나귀를 탄 그리스도만을 따로 떼어 팔메젤(Palmesel)이라고 하는 나무 조각상을 만들었는데, 아예 바닥에 바퀴를 달아 끌 수 있도록 했다.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이전까지 이 나귀를 탄 그리스도상을 만들어, 성지주일 전례에 사용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려했던 중세 인들의 종교적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일례이다. 나귀는 예루살렘 입성 뿐 아니라, 예수 탄생이나 이집트로의 피신에서도 등장하는 동물인데, 가장 비천한 동물로 겸손을 상징한다.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왕 예수는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백성들은 겉옷을 펴서 깔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목소리 높여 외친다.
호산나
직역하면 오,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아람어 호샤나의 헬라어 음역이다.
첫 번째 호산나
다윗 가문의 왕께 찬양하라 또는 영광이로다. 15절을 보면 아이들이 계속 이 소리를 외친다.
두 번째 호산나
가장 높은 곳에서가 붙어서 가장 높은 곳에서 찬양하라 또는 영광이로다. 이 호산나는 시편 118:25를 인용.
그리고 백성들은 시편 117편을 떠올리며 호산나를 외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된 축복을 가져올 다윗의 후손이다. 무리의 이 열광적인 외침은 큰 절기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의 민족주의적 열정과 흥분에 일치했을 것이다.
로마 군대와 예루살렘
기원전 70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때, 당시 로마는 아우쿠스투스 곧 옥타비아누수의 시대엿다.
누가복음 2장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불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동맹,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등으로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특히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매년 1월 1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행해진 군사적 맹세를 통하여 표현된 황제를 위한 충성은 황제의 권력과 힘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행사였다.
그랬기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가이사처럼 백마를 탄 개선장군, 승리의 황제가 필요하다고 갈망했다. 그리고 이제 메시야가 등장해서 복수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복수다!’ 받은 만큼 갚아줄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백마를 탄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로마로 진격할 구원자가 바로 예수일 것이다라는 희망, 민족주의적인 갈망이 예수를 향해 모아졌다.
그래서 대다수의 군중들은 종려나무를 꺽어와 바닥에 깔고 겉옷을 벗어 경배한다.
승리의 입성
10-11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승리의 입성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얼른 봐도 전에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마저도 그에게 환호했던 것처럼 보인다.
눅 19:40
이때만큼은 군중들이 소리치게끔 내버려 둔다.
갈릴리에서 등장한 이 선지가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것일까? 요 12:20을 보면 그리스 사람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 12:20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그 무렵 예루살렘에는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와 있었다. 이들 눈에는 마치 왕이 나타나 자기 왕좌를 내놓으라고 득달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종려주일에는 베다니에서 온 무리들, 나사로의 기적에 크게 감명을 받은 자들이 예수를 둘러쌓을 것이다.
당장은 예수께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환호는 곧바로 멸시와 수난의 전주곡으로 바뀔 것이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에는 종교 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분노를 품고 잇었을 것이다.
예수 자신도 이 떠들썩한 행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 누가복음 19:41을 보라.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2)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심판, 벧전 2:12 참조
예수님은 군중들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열렬히 호산나를 하던 그 입술로 조금 뒷면 십자가에 못박으라하고 열렬히 외칠 수 있음이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마 21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어찌나 열광적이었는지 온 마을이 소동을 할 정도였다.
정보인가, 신앙 고백인가
10-11절
이는 누구뇨?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베드로의 고백과 달리 이 말은 신앙 고백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단순한 정보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에 관해 익히 들었고 보았고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렇듯, 예수에 관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신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역시 찬찬히 살펴보자. 예수님에 대한 나의 지식이 하나의 정보인지 아니면 신앙 고백인지 말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무리들은 예수를 진정한 메시야 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잇지 못했고, 예수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어떤 이들에게 예수는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였을 뿐이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열망을 성취시켜줄 개선장군과 같은 황제였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으나 무리들은 이와 같은 겸손한 입성의 중요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가 지나간 자리의 한 알의 씨앗
백성들의 환호성이 끝나고 무엇이 남았을까?
종려나무 가지들이 바닥에 어지럽혀있고 허무감
예수가 나귀를 타고 지나간 자리,
무엇이 남는가?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예수가 죽었지만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십자가에서는 여전히 많은 죄인들이 매달려 죽었다.
수많은 자칭 메시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의 삶은 그대로였다. 로마는 여전히 강력한 행정력과 군사력으로 유대를 통치했다
예수가 사라지고 볼거리도 사라졌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무엇을 남겨주었을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럴 수 잇다.
우리의 신앙적 열정과 열심히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내가 설교를 듣는다고 내 삶이 완전히 뒤바뀌지는 않는다.
수십 년을 신앙생활도 그러하다
심지어 설교를 하는 목사조차도 그리 대단한 삶 인격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다.
예수를 행한 마음자체가 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의미를 찾겠는가?
요 12:20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요한복음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4)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4)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또는 영혼또는 영혼
헬라사람들까지 예수를 보러왔는데 그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보자.
교회, 그리스도인의 의미
'교회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과연 뭘 할 수 있냐?'고. 세상에 태어나 '교회' 한 번 안가봐도 기도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키진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슨 변화를 주었을까요?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흔햇고, 자칭 메시야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란한 소동과 같은 예루살렘 입성이 끝나고 난 뒤 사람들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신앙생활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요?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멈춘다고 갑자기 인생이 끝나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고 아무나 나갈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문입니다. 차이는 교회를 신앙을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고 봐요. 누구나 다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또 누구나 쉽게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 둘 수 있어요.
하지만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전 교회를 지키는 사람, 예수님과 마지막가지 걸어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바고 그리스도인의 영성 신앙 믿음 이겠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모든 인류의 삶에 가장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00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통해 새 삶을 얻고 새로운 가치관을 지니고 나라와 사회가 변하게 됩니다.
나귀를 탄 그리스도인들
나귀를 탄다는 것은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걸어가면 주위 사람과 사물이 보이지만 자동차를 타고 가면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하늘만 보인다.
예수를 다라 천천히 걷자. 주위 사람들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이런저런 상황들을 보자.
나귀를 탄다는 것은 내 눈의 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말은 훨씬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나귀를 타면 사람들의 눈높이를 마주한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이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자신의 지식과 사회적 배경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든다. 다스리려한다. 자신이 영웅이 되어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같은 높이에서 사람들의 주름을 보고 숨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으로 천천히 올라가셨다.
사람들 눈 속에서 로마를 전복시키고 유대인의 나를 건설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함을 하나님의 간절함으로 대체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바라셨다.
기적을 베풀고 병을 고치고 말씀을 하셨다. 그와 함께 했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바람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따라야 했다.
그것이 바로 한 알의 씨앗이 죽는 방법이었다. 예수라는 씨앗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나귀를 타면서 곱씹지 않았을까?
우리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시다. 위풍당당하게 백마가 아닌 겸손하게 나귀를 타자.
겉옷을 벗고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는 열정대신 마지막까지 예수를 배신하지 않고 뒤따라가는 충성심을 보여주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 높여 외치는 소란스러움 대신 묵묵히 예수를 따라 살아가자.
그리고 예수님이 멍에를 메는 나귀를 타신 것처럼 우리도 나귀를 타자.
나귀를 타고 새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