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고대 이스라엘의 주변 세계(1)
구약성서에는 여러 민족과 나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이스라엘의 주변나라들을 이해하는 것이 성서의 배경과 역사를 알아가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힉소스
힉소스는 이집트를 잠깐 지배한 아시아인들이었다. 제15왕조를 구성하는 제2중간기(기원전 1675-1552 무렵)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108년 동안 6명의 왕이 있었다. 힉소스 민족에 관한 주요한 참고자료는 마네토 1의 기록이다. 요세푸스 2와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3세기의 기독교 학자)에 의해 인용된 마네토와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인용된 마네토의 자료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힉소스의 언어는 북서 셈어에 속한 것 같다. 한때 대규모의 아모리인의 인구이동의 한 부분으로 ‘힉소스의 침입’이 있었다고 주장되었다. 최근에는 ‘아시아인들’이 제12왕조 후반부터 제13왕조 사이의 시기에 노예나 용병으로 나일 삼각주의 동부지역에 서서히 정착했다는 의견이 더 힘을 받고 있다. 힉소스의 통치가 점진적이어는지 갑작스럽게 일어난 쿠데타였는지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힉소스의 통치 기간 중 레반트 해안, 키프로스, 심지어 에게 해에 이르는 광대한 무역이 있었다. 이집트 문서에 따르면, 힉소스는 카모세(Kamose)와 제18왕조를 세운 그의 형제 아모세(Ahmose)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났다.
학자들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였을 때가 힉소스 시대이고 이집트의 재집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와 달리 보수적인 학자들은 노예생활을 하게된 때가 힉소스의 시대라고 본다. 힉소스 민족을 성서의 어느 시대와 연결시키느냐가 출애굽의 시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아모리인(아무루 Amuru)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민 13:29)
아모린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치된 의견이 없다. 이 명칭은 이미 기원전 2300년경에 사용되었다. 과거에는 아모리인을 유프라테스 지역 문화의 가장자리에 있던 유목민으로 여겼었다. 다른 학자들은 아모리인이 원래는 유프라테스 중류의 좁은 지역에 있던 농부였는데, 점차 초원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양을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설형문자로 이루어진 문서에서는 아모리인이 황무지에 사는 교육받지 못한 다소 거친 이들로 묘사되고 있으나 다소 편견을 가진 견해이다. 아모리인의 이름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셈어의 이름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때때로 완전한 문장을 이루고(예, ‘신께서 축복해주신다’), 언어의 문법을 이름 자체만으로 부분적이나마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모리인의 언어는 북서 셈어이고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우가릿어 등과 같은 어군이다. 적어도 아모리인의 기원을 추적해 보았을 때 동부 아시리아인과 바벨론인 보다는 북서 셈어를 쓰는 이들에 더 가깝다.
아모리인 조상들이 언제 가나안을 향해 남쪽으로 이주했을까? 현재로서는 확정적인 증거가 없다. 이전에 고고학자들은 초기 청동기Ⅳ나 중기 청동기Ⅰ(기원전 2250-2000) 시기에 아모리 인들과 함께 데라와 그의 가족들(아브람, 사래, 롯)이 가나안 땅을 향해 이동했을 것이라는 ‘아모리 가설’을 주장했었다. 이 시대는 이집트의 첫 중간 시대나 메소포타미아 붕괴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 붕괴의 주범으로 아모리인을 지목했으나 현재는 이것을 지지할 만한 가나안에서 나온 직접적인 증거 자료가 없다.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겔 16:3)에서 아모리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가나안, 아모리, 헷 사람의 민족 정체성이 넓은 의미인 ‘가나안’이란 이름으로 희석되었다.
아피루/하베루
제2천년기 문서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는 ‘아피루’ 또는 ‘하피루’ 또는 ‘하베루’이다. 1세기 전에 이 문서들이 처음 연구되었을 때 아피루는 ‘히브루’와 관계가 있을 것을 것이라고 해서 히브리인 곧 이스라엘과 연결을 시켰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아피루와 히브루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브리’( yrIb.[i)를 ‘히브리’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원래는 인종적 용어가 아닌 사회적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추방자, 피난자나 부랑자를 뜻한다. 초기 문서에서 아피루는 단순히 ‘이주자’를 의미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범주에 일시적으로 속하는데 이유는 그들이 곧 새로운 사회와 장소에 융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자들은 종종 토착민에 의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데 곧 돈을 받고 전투를 치르는 용병이다.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아피루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일부는 약탈과 도둑질을 하고 다른 이들은 높은 경매 가격에 용병으로 스스로를 파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피루라는 용어는 ‘사회에서의 추방자’ 또는 ‘강도’와 더불어 경멸적인 뜻을 포함한다.
아마르나 서신의 몇몇 경우에는 아피루에 동조하거나 이집트 파라오의 이익에 반하여 아피루를 고용한 행위를 비난하거나, 심지어 도시 국가의 통치자들이 아피루가 되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성서의 몇 몇 구절에서 아피루는 약하고 가난하며 법적인 보호가 필요한 노예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한다(출 21:2; 신 15:12; 렘 34:9, 14. 히브리어로 이브리를 한글성경에서는 모두 히브리로 번역).
알라라크(Alalakh)의 왕, 이드리미는 자신이 망명자가 되었을 때 아피루와 함께했다.
“내 가족의 중심부인 할랍에 나쁜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에말(Emar) 사람들에게 피신을 갔다.......나는 말, 전차, 하인을 데리고 도망가서 사막을 건너고 심지어 수티아(Sutian) 용사들의 지역으로 들어갔다.......그러나 다음날 나는 계속 나아가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나는 가나안에 있는 암미아(Ammia)에 머물렀다. 암미아에는 힐랍, 무키스키, 니(Ni’)의 원주민들, 그리고 아마에(Ama’e)에서 온 병사들도 살고 있었다.…….그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지냈다. 7년 동안 나는 ‘하피루’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ANET 557
이러한 장면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굴에 있을 때 여러 부랑자들과 함께했던 장면을 떠올린다.
사무엘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샤수(Shosu, S3sw, Sutu)
몇몇의 이집트 문서에서 S3sw로, 보통은 음표문자로는 샤슈(Shasu) 또는 쇼슈(Shosu)이다. 아마르나 명판 같은 아카드 문서에는 같은 집단을 수투(Sutu)로 언급한다. 샤수는 이집트 문서에 나오는 남부 요르단 건너편 지역과 관련되고 있다. 세티1세는 아시아로 출정하여 사일(Sile) 요새로부터 가나안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샤수를 물리쳤다. 파피루스 아나스타시(Anastasi) Ⅳ에 나오는 국경 지방의 보고에 따르면 샤수 부족이 가축들과 함께 요새를 건너도록 허락받았다. 일부 문서는 샤슈와 연관 있는 지역을 언급한다(‘샤수의 땅 사맛’, ‘샤수의 땅 야후’, 샤수의 땅 세일‘, ’샤수의 땅 라반‘, ’샤수의 아르벨‘ 등). 람세스 2세는 샤수의 땅을 파괴하고 세일 산을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에돔이 샤수 부족을 언급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샤수는 에돔, 세일과 아라바 동편의 트랜스 요르단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다소 먼 지역의 지명을 포함한 목록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또한 가데스(Qadesh) 전투에 관한 람세스2세의 기록에 따르면 히타이트를 위해 염탐을 하던 두 명의 샤슈를 잡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가장 뜨거운 논쟁은 이스라엘 민족과 샤수의 관계이다. 메르넵타가 수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복과 관련되었던 부조에 부분적으로 근거한다. 일부학자는 비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부조에 나타난 샤수로 확인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랭크 유르코는 메르넵타 석비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는 이스라엘(‘이스라엘은 멸절되었다’)이 바로 이 파라오에 의해 정복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여기에 파라오의 군대에게 정복되는 것으로 묘사된 사람들은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두르고 있는데, 이러한 치마는 가나안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다른 장면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회에서 등장하였다(이주해 들어온 것이 아니다).
반면에, 앤슨 레이니는 카르낙의 부조에 새겨진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인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유르코가 말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가나안 사람들이다. 레이니에 따르면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이들은 카르낙의 다른 부조들에도 발견되는데 이들은 가나안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외부에서 방황하던 유목민들(샤수)들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