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고대 이스라엘의 주변 세계(2)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
수메르인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수메르인의 존재 자체가 19세기 말엽에서야 겨우 확인되었으나 20세기 전반부에 수메르인의 거의 모든 주요 거주지가 발굴되고 수메르어가 기록된 많은 토판들이 발견되었다.
20세기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고대 근동에서 발달한 문명들은 문화적 성장이 절정에 달했던 최초의 수메르 문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글쓰기, 도시 국가, 자본 축적, 도공의 활차(도르래), 각종 기념 건축물, 육십진법, 성문법, 학교와 원통 인장 등이 발달했다.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 수메르가 미친 영향의 범위는 1970년대 중반에 수메르어와 셈어(에블라어)로 기록된 3천년기 중엽의 많은 토판기록이 발견된 고대 시리아 유적지 에블라가 발굴됨으로써 밝혀졌다. 에블라 문서가 발견되기까지는 3천년기의 시리아는 문화적으로 무의미한 곳으로 간주되었었다. 그 토판들은 수메르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메소포타미아 중심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도시국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수메르어는 갑자기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초기 역사 연구를 위해 필수적인 언어가 되었고, 수메르 문화가 일찍 확산되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바벨론인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왕하 24:20-25:1)
바벨론인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목해야한다. 첫째, 순전히 역사적 관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 가운데 훗날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고대 구약 세계에 나타난 거의 모든 문화와 종교의 토대를 물려주었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 근원이 되었다.
바벨론이란 명칭의 최초 형태는 바빌(Babil)로 여겨지는데 그 기원과 의미는 이미 옛적에 잃어버렸다. 그 도시는 아카드 제국(2334-2193)직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그 단어는 수메르어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서는 창세기 11:9에서 그 이름에 주어진 부끄러운 해석으로 바벨론이란 이름에 관한 전승을 간직하고 있다. 바벨론인들과 그들의 선조인 수메르인은 이스라엘의 이웃 민족들을 위한 철학적, 사회적 기반을 수립했다.
20세기에 고대 바벨론에서 나온 방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가 집중적인 관심을 끌면서 성서와의 연관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부 학자들은 모든 사상들이 바벨론에서 기원했으며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가정하는 ‘범 바빌로니아주의’(pan-Babyloniasm)으로 넘어갔다. 이런 접근법은 지나친 것으로 드러났지만 아직도 여러 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 간의 개념적이고 문화적인 연속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와 길가메쉬 서사시,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등과의 관계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바벨론인은 3천년기의 수메르-아카드 문화를 개조하여 전파하였다. 구약 성서의 이스라엘은 그 문화적 저장고의 주류에 속해있다. 그들의 문화와 이스라엘 문화와의 차별성과 유사성은 온전히 탐구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바벨론은 구 바벨론과 신 바벨론으로 나뉘며 구 바벨론은 함무라비 왕이 속한 시대이고 신 바벨론은 성서에서 남유다를 멸망시킨 제국이다.
미타니 왕국(기원전 1600-1350)
미타니 왕국은 한 때 두 개의 다른 인종 집단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제2천년기 초기에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침투한 후리 족(성경에는 호리 족속)이었다.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창 14:6)
후리 족은 소아시아와 북부 시리아에 걸친 많은 도시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1500년 이후에 시리아로 침투했다. 후리 족의 지도자들은 남부 러시아에서 이란 및 북부 인도로 이동한 사람들의 조상의 일부인 인도아리아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이름 및 언어의 일부 낱말 또한 이러한 주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인도아리아인의 영향이 나타나있더라도, 지금은 과장되었다고 본다.
미타니 왕국은 후리 족과 아모리인 국가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집트와 충돌을 하지만 투트모세4세와 기원전 1400년경 평화조약을 맺는다. 이후 미타니는 히타이트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다가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되었다.
아시리아인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왕하 17:23-24)
학자들은 이라크 북부의 여러 언덕으로부터 아시리아 민족과 그들의 문화를 복원시켰다. 아시리아의 역사적 유적은 구약 성서가 그들을 갈릴리의 약탈자로 그리고 한때 교만했던 사마리아의 파괴자로 기록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략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733년과 732년의 출정에서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셀은 다메섹을 정렴하여 르신 왕을 쫒아내고 그 도시를 아시리아의 지방행정체제에 통합시켰다. 친-아시리아 인사들은 사마리아에서 베가 왕을 축출하고 고분고분한 호세아 왕을 세웠다. 아시리아 자료에는 이런 표현을 한다.
“이스라엘...그 모든 주민과 그들의 재산을 나는 아시리아로 가져왔다. 그들은 그들의 왕 베가를 몰아냈고 나는 그들을 다스릴 왕으로 호세아를 두었다. 나는 그들에게 조공으로 10만달란트의 금과 은 1000달란트를 받았고 그것을 아시리아로 가져왔다”
이 사건을 성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왕하 15:29)
그리고 결국 사마리아 성이 함락되면서 721년 북이스라엘은 멸망한다.
672년 에살핫돈은 자신의 사망 이후 순조로운 정권 이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아들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왕으로 삼고 또 다른 아른 샤마쉬-슘-우킨을 바벨론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652년 샤마쉬-슘-우킨이 바벨론을 이끌고 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4년 간의 전쟁 끝에 아슈르바니팔이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타격은 너무 컸다 아슈르바니팔은 성서에서 사마리아에 외국인을(아마도 엘람인을) 이주시켰을 ‘존귀한 오스납발’로 한번 언급된다(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에스라 4:10).
아슈르바니팔은 627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슈르-에틸-일라니가 뒤를 이었고, 그의 형제 신-샤르-이쉬쿤이 612년까지 다스렸다. 이후에 나보폴라살이 바벨론의 왕좌에 올라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609년, 아시리아 군대는 바벨론에 의해 하란에서 전멸되었다.
아나톨리아, 시리아-팔레스타인
히타이트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왕하 7:6)
성서에서 헷 사람으로 기록된 히타이트인들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데 히타이트인들의 조상들이 언제 그리고 어디서 아나톨리아로 들어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히타이트는 이름의 사람들 또는 헷의 족속들이 북쪽(아나톨리아 또는 북시리아)에서 왔는데, 성서(창세기 15:20, 헷 족속)에서는 여러 곳에서 이들을 언급하는데, 이스라엘 왕국 시대(950-700년)에서야 알려진 헷 족속을 창세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 확실성에 의심을 받는다. 학자들은 한 가지 대안을 내놓는다.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히타이트를 언급한 구절들은 거의 확실히 14-13세기에 히타이트 제궁의 지배를 받고, 신-아시리아 왕들의 연대기에서 하티(Hatti)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는 시리아인 왕국들을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여호수아서에서 언급되는 히타인트인들은 본토 팔레스타인이고 가나안인, 여부스인, 아모리인 등과 함께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헷 족속은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페니키아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삼하 5:11)
헬라어 ‘포이닉스’에서 유래한 페니키아라는 명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닌, 해안의 중부 및 북부 해안지역을 가리켰다. 두로, 시돈, 비블로스 등 이 지역의 해안선을 따라 좋은 항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셈조 계열의 페니키아인들은 위에서 말한 지중해 세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해상무역을 펼칠 수 있었다.
아람 시리아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왕상 20:1)
아람인의 초기 성장은 알기 어렵다. 그들은 분명히 기원전 12세기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고대의 문헌에 등장하였다. 그때는 1250년경에 시작된 고대 근동 전체의 전반적 혼란과 붕괴가 있었던 바로 그 시대였다.
이전에는 아람인들이 12세기와 11세기에 발견한 땅을 침략하여 북쪽을 휩쓸면서 본토 주민을 정복하고 신속히 그 지역을 아람화했던 시리아 사막에서 온 유목집단으로 보았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근동의 목가적 유목민들이 문화의 이런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고고학 증거는 이런 전환기의 거대한 인구 이동에 관해 아무런 징후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증가했다. 경제적, 풍토적 그리고 사회적 원인이 그 문화들의 몰락에서 드러난 변화에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초기의 자료는 아람인이 상부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온 새 이주민이었다는데 대한 명확한 단서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2천년 기에 줄 곳 그 지역에서 살았던 서부 셈어를 사용한 민족들로서 어떤 이들은 목축인이었고, 일부는 시골, 마을 ,도시에서 살았다. 히타이트 제국이 몰락한 이후 한동안 서부 셈족 집단이 사람들이 몇몇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점점 우세해지면서 바로 이 집단이 12세기 이후의 자료들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람인과 아모리족을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증거가 너무 애매하여 지지받지 못한다.
아람인은 언어학적으로 아람어로 알려진 서부 셈어의 방언들을 사용하는 첫 천년기에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주요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주로 살던 민족들과 관련된 큰 집단이었다. 남부 시리아의 아람인은 성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이들은 다메섹을 수도로 한 아람 나라에 해당된다. 그들의 언어는 서서히 페르시아 제국의 국제공용어가 되었고 결국 히브리어를 포함한 그 지역의 여러 방언을 대체했기 때문에 아람인은 근동에서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블레셋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삿 16:23)
블레셋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플리쉬’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약에서 288번 나타나고, 플레셋이라는 용어도 8번 나온다. 창세기에는 그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서너 번 그들과 마주쳤다( 창세기 21:32). 성경에 따르면 블레세인은 크레타 섬을 포함한 에게 해의 섬들과 연안 지역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에스겔 25:15-16과 스바냐 2:4-5에서 그렛인(크레타)이라는 용어는 블레셋과 시적 병행구로 나타난다. 예레미야 47:4와 아모스 9:7에서는 갑돌과 관련이 있다. 갑돌은 크레타 또는 그 주변일수 있다. 갑돌인과 그렛인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신명기 2:23에서도 확인되며 거기서 그렛인은 가사 남부지역에 정착하고 갑돌인은 다윗 시대에 그 지역을 차지했다고 한다(삼상 30:14).
성경 외적인 자료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3세(1184-1153)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그것은 통치 8년에 이집트인과 그들이 ‘해양 민족’이라고 불렀던 민족 간의 대규모의 지상전과 해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해양 민족과 가운데는 ‘필레셋’으로 알려진 한 민족이 있었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을 성서의 블레셋과 일치시킨다.
따라서 창세기에 블레셋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며, 아마도 훗날 업데이트 된 명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