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메시지는 신약신학 자체의 일부분이라기보다 신약신학의 전제이다’ -불트만
‘일체의 신약신학은 예수의 신학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 - 영국 학자 니일(S. Neill)
초기 기독교는 정경문헌 곧 성서가 바로 이해되기만 하면 보편타당한 것으로 믿어졌기에 성서신학(구약신학, 신약신학)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중세시대에 가톨릭교회는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교회 전통의 일부로 이해했다. 교회의 전통과 권위는 성서 해석을 지배했기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전통과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개혁의 구호로 삼았다.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보다 성서 자체가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는 원리를 제창하게 된다.
특별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의미심장한 공헌을 하였다. 1516년과 1519년 사이에 ‘문자와 영’, ‘율법과 복음’의 결정적 구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루터의 ‘오직 성서’의 새로운 해석학의 본질이 시작되었다.
‘성서신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선구자들은 재침례파(Anabaptists) 운동에 속한 사람들로서 1530년대 오스왈드 글래이트(Oswald Glait)와 안드레아스 피셔(Andeas Fischer)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 뒤에야 비로소 ‘성서신학’이라는 표현이 1629년 볼프강 야콥 크리스트만(Wolfgang Jacob Christmann)의 「성서 신학」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이 책은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1643년 헨리쿠스 디스트(Henricus A. Diest)의 「성서 신학」이 지금도 구할 수 있는 최초의 책이다.
증빙 본문(proof texts)
기독교 초기에 전통적인 교리를 지지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성서의 본문을 무분별하게 인용한 것이 증빙 본문이다. 이때는 성서를 그 자체로 해석하거나 연구하기 보다는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 교황의 성서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독일 경건주의(Pietism)의 강조는 성서신학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경건주의에 있어서 성서신학은 메마른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의 도구가 되었다. 경건주의의 창설자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cob Spener, 1635-1705)는 성서신학으로써 개신교 스콜라 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스콜라 신학이라고 불린 개신교 신학은 그 공허한 사변들과 생명 없는 이론들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1745년에 이미 성서신학은 교리(조직)신학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전자가 후자의 기초로 생각되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신학이 단순히 교리학의 시녀 역할로부터 벗어난 것을 뜻한다.
참고문헌
Gerhard F. Hasel, 「신약신학: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 권성수 역 (서울: 엠마오, 1994)
Ferdinand Hahn, 「신약성서신학 1」, 김문경 외 5인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Leonhard Goppelt, 「신약신학」,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