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예레미야 애가 2:5-6)
바벨론의 멸망
기원전 587/6년 8월, 예루살렘과 야훼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왕하 25:8-10) 1 남유다 왕국은 582년에 한 번 더 독립을 시도하였지만 느부사라단 장군에 의해 진압됩니다(렘 52:30).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
나보폴라살에 의해 시작된 강력했던 바벨론 제국은 기원전 562년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 605/4-562년)가 세상을 떠나자 급속히 힘을 잃게 됩니다. 2 사실 바벨론 제국은 느부갓네살의 개인적인 제국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으며, 남유다를 패망시킨 바벨론은 그가 죽은 지 겨우 20년 뒤인 540/539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바벨론 멸망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3
“티쉬리 월에 고레스가 아카드 군대를 티그리스 강가 오피스에서 공격했을 때, 아카드 사람들이 후퇴하였다. 그가 전리품을 약탈하였고 사람들은 살육하였다. 그달 14일에 싸우지도 않고 십파르가 함락되었으며 나보니두스는 도망하였다. 16일에 구티움의 총독 고브리야스와 고레스의 군대가 전투없이 바벨론에 입성하였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웰 마루둑(Awel Maruduk, 또는 에윌 므로닥, Evil Merodach, 561-560년), 그의 사위 네리글리살(Neriglissar, 559-556년), 네리글리살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Labashi Marduk, 556년)은 모두 무능하게 바벨론을 이끌었습니다. 마지막 통치자인 나보니두스(Nabonidus, 또는 나부 나이드, 555-539년)는 라바쉬 마르둑을 암살합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나보니두스는 통치자가 된 뒤 3년 동안 섭정왕으로 아들 벨사살(Belshazzar)을 임명하고 자신은 시리아, 레바논을 향해 군대를 이끌었으며 아라비아에 있는 테이마(Teima)에서 10년을 머물렀습니다. 나보니두스는 바벨론 문서들에서 결코 ‘왕’으로 불리지 않으며 왕의 지위를 누린 적이 없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한 가장 결정적인 까닭은 나보니두스의 종교 때문이었습니다.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의 주(主)신인 마루둑을 형식적으로 숭배할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시하였으며 대신 하란의 달신 신(Sin)을 열광적으로 숭배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북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종교 중심지인 하란 출신의 유명한 아다드 굽피(Adad guppi)인데 분묘의 비문에 기록된 그녀의 전기는 하란의 달신을 향한 놀라운 헌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4
페르시아의 고레스 2세(Cyrus Ⅱ, 559-530)가 539년에 바벨론을 침략했을 때 나보니두스의 마루둑에 대한 형식적인 숭배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백성들은 고레스를 정복자가 아닌 해방자로 맞이하여 그의 입성 길에 푸른 가지들을 펼쳐놓았으며, 이로써 바벨론은 전투 없이 페르시아에 함락되고 맙니다. 벨사살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나보니두스는 카르마니아(Carmania)로 유배됩니다. 바벨론은 626년에 발흥해서 강력하고 화려하게 그러면서 너무나도 짧은 88년을 마치고 539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겨우 6명의 왕(나보폴라살, 느부갓네살, 에윌 므로닥, 네리글리살, 라바쉬 마르둑, 나보니두스)이 전부였습니다.
페르시아의 발흥
바벨론의 자리를 페르시아가 차지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고레스 2세(Cyrus Ⅱ)의 영도 아래 동쪽으로부터 밀고 들어온 비(非) 셈족 국가였습니다. 아리안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데, 4-3천년대에 인도·유럽족인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의 갑작스런 기후 변화, 늘어난 인구, 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쪽으로간 사람들은 유럽 아리안족, 남쪽으로 간 사람들은 이란과 인도 아리안 족의 선조가 됩니다.
신중한 행정정책을 통하여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강제이주정책을 유화정책으로 바꾸어 포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이는 효과적으로 포로민들을 다루는 방법으로 협력적인 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모험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귀환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를 우호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페르시아의 세력은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가 등장할 때까지 크게 융성하게 됩니다.
- 요시야의 뒤를 이어 단지 네 명의 왕이 유다를 다스린다. 여호아하스(609년)- 요시야의 넷째 아들이고(대상 3:15), 또 다른 이름은 살룸(렘 22:10). 이집트로 끌려감(왕하 23:34). 여호야김(609-598년; 엘리야김)- 요시야의 둘째 아들. 기원전 604~603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사망(왕하 24:1-6). 여호야긴(598년; 여고냐)- 여호야김의 첫째 아들, 598/7년 바벨론으로 끌려감(왕하 24:15; 겔 17:12) 시드기야(598-597년; 맛다니야) - 요시야의 셋째 아들, 여호야긴의 숙부,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감(왕하 25:7; 렘 37:1; 겔 17:13). [본문으로]
-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난 뒤 느부갓네살의 외교 정책 활동들은 차츰 사라진다. 요세푸스는 예레미야 52:30이 증명하는 유대인의 제3차 포로사건이 있었던 582년에 느부갓네살이 코엘레-시리아, 모압과 암몬으로 원정했다고 보고한다. 이것은 반바벨론 저항이 계속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에 나타난 기대들(렘 43:8-13; 46:13-26; 겔 29:17-21; 30-32)과는 달리 느부갓네살의 이집트 침략에 관한 이집트의 자료는 전혀 없다. [본문으로]
- James B. Pritchard, 「고대근동문학 선집」, 김구원 외 4인 역 (서울: CLC, 2016), 549. [본문으로]
- Alfred J. Hoerth et al., 「고대 근동 문화」, 신득일, 김백석 역 (서울: CLC, 2012), 9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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