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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왕조시대 이스라엘

2. 하나의 공동체, 평등한 사회

by 에르고니아 202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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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12지파의 모습은 단일한 체제가 아닌 느슨한 연합체입니다. 12명의 사사들의 지도력은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위급한 상황에서만 발휘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특정한 지파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21:19에서 보듯이 연례적인 모임을 위해 실로에 모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치된 행동을 보여줍니다(삼상 1:3; 2:19 참조).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본문은 사사기 19-21에 나오는 기브아인들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레위인이 베냐민 사람들이 자신의 첩을 욕보여 죽이자 격분한 나머지 그녀의 시체를 열두 조각 내어 이스라엘 전국에 보냅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에 12지파는 신속하게 뭉칩니다(19:30).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집회에 모여, ‘한 백성으로 뭉쳐응징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렇게 사사기에서 보이는 초기 이스라엘의 체제는 평등주의와 통합주의를 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은 사회·정치적으로 침투하려는 가나안의 계급과 계층 구조를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사사들은 위기의 순간에만 하나님의 힘을 빌려 전쟁을 할 뿐, 어떠한 권위와 권력도 거부합니다. 여호와 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는데,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생존과 행복한 삶이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최고로 하는 이상적인 사회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사기 21:25는 사사 시대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후에 사무엘서에서는 왕정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기록합니다. 사사시대가 지난 뒤에 마지막 사사 사무엘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왕을 세웁니다. 사사들은 정치와 종교의 단일 지도자였으나 왕이 들어서면서 정치권력은 왕에게 넘어가고 제의에 관한 것은 제사장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환상(?)에 길들여있는 상황에서 왕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무질서와 방종과 같습니다.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현명한 왕과 강력한 왕권이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25을 이렇게 해석합니다.[각주:1]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에 백성들은 무질서하게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왕을 세운 뒤 결과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하게 되고 결국 다른 나라에 의해 둘 다 멸망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예언서 대부분이 왕과 왕궁에 연관된 세력들(종교 지도자들, 재판관들, 사회 엘리트들)을 향해 비판과 심판을 선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 이 아닌 사람 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왕은 여호와 만으로 충분했으며 인간 왕은 평등사회를 깨드릴 뿐입니다.

따라서 21:25을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에 백성들은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사무엘서의 위치

히브리어 원문에서 사무엘 상하는 열왕기 상하처럼 한 권인데 70인역은 이 두 책들을 4개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사무엘상의 최종 형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후인 기원전 6세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사무엘상에 보존된 전승들은 대부분 이보다 훨씬 오래된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이 전반적으로 후대의 기록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무엘상 2:10에서는 아직 왕을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한나가 왕에 대해서 언급하고, ‘오늘날까지라는 말(삼상 5:5; 6:18; 27:6; 30:25)

-사무엘상 9:9의 부연 설명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사무엘하가 끝날 때까지 다윗은 살아 있었지만 그의 통치 기간은 삼하 5:5에 제시 등.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사무엘상의 전통적인 히브리어 본문(마소라 본문)70인역과는 다릅니다. 1953년에 사무엘상의 일부가 사해사본들 가운데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히브리어 사해사본의 어떤 부분은 마소라 본문보다 70인역 본문에 더 일치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70인역의 어느 부분은 마소라 본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고대의 히브리어 본문에 기초했으며, 또한 몇몇 구절들에서는 마소라 본문보다는 70인역이 히브리어 원본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사사, 사무엘

이스라엘이 왕을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블레셋의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외부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블레셋은 철기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노략을 일삼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하던 느슨한 지파 연맹 체제는 블레셋뿐만 아니라 암몬의 위협과 내부(사회적, 경제적, 인구학적) 압력으로 해체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지도력의 한계를 가졌고 카리스마적 지파 지도자들의 역량이 블레셋의 계속되는 공격과 나라의 규모에 비해 힘에 부쳤습니다. 많은 사역들, 사법적 재판의 기능과 군사적 기능, 정치적 역할 등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연합 체제는 약 1세기 동안(기원전 1030-931년경) 이어졌습니다. 그 뒤에 사울, 다윗, 솔로몬 등 3명의 왕은 사사 시대에서 왕국으로 이어지는 왕정시대를 열게 하였습니다.

 

연합 왕국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상 8장부터 열왕기상 11, 역대기상 3장부터 역대기하 9장까지 매우 풍부하지만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서의 기록이 의도적으로 이 시기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 초기의 전환은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하나님의 이름또는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다’)의 제사장 재직 시기에 일어납니다. 사무엘의 아버지의 이름은 엘가나이고, 에브라임 지파로 벧엘 남쪽의 라마 출신입니다.[각주:2]그는 매년 실로에 있는 성소로 순례여행을 갔습니다. 아내 한나는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낳게 됩니다.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비느하스와 홉니의 불경스러운 행위 때문에 여호와 는 엘리 제사장 계열을 폐하고 장래에 등장하게 될 다른 제사장 계열을 세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어떤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엘리에게 계시되고 또 꿈으로 소년 사무엘에게 계시됩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와 사사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사무엘상 1-3). 이때,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 벌어지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법궤를 전쟁터에 들고나간 이스라엘 민족은 예상과는 달리 전투에서 지고 법궤까지 빼앗깁니다(삼상 4). 전쟁에서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그 소식을 듣던 엘리마저 죽게 됩니다(삼상 5:1-7:2). 여호와 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서 단순히 여호와 의 법궤(이름)만을 앞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순종 없는 종교적 형식은 도리어 법궤를 빼앗기는 비극을 불러오고 이는 곧 여호와 의 떠남을 상징합니다(삼상 4:21).

 

이때 사무엘은 미스바에 이스라엘을 모으고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다시 봉헌합니다. 그들은 블레셋을 이기고 기념비를 세워 에벤에셀’(여기까지 도우셨다)이라 하였고 블레셋은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위협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여호와 앞에 두어 기록한 책(삼상 10:25)선견자 사무엘의 글’(대상 29:29)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사무엘은 라마에 여호와 를 위한 단을 쌓고 벧엘, 길갈, 미스바에 차례로 머물며 사사로서의 일을 감당했습니다(삼상 7:3-17).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과 달리 불법을 저지르고(삼상 8:1-3)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을 요구합니다.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정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은 왕국시대 이스라엘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로 왕권의 부정적 측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삼상 8:11-17).

 

이에 왕의 임명을 반대하라는 여호와 의 지시(삼상8:6-22)가 있었지만, 곧 사울을 비밀리에 왕으로 세우라는 지시를 받습니다(삼상9:15-24). 왕을 세우는 것이 여호와 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뜻대로 왕을 세워줍니다. 사무엘은 왕정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리하여 정착과 사사들의 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은 왕정 국가로 접어들게 됩니다. 어찌 보면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 자체는 정당합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왕 없이 나라를 유지한 것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주저했던 이유는 여호와 께서 위대하고 유일한 왕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전에 사사기 8:23에서 기드온은 왕권을 거부하였었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마지막 사사, 사무엘

사사시대를 마무리하면서 사무엘상 12:10은 고백과 여호와 께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백성들의 호소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언급합니다.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그러나 사무엘의 전체 연설은 이스라엘이 변덕스러우며 지속적으로 죄에 빠지기 쉽다는 인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사사 시대 전체를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온전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는 대신 인간 왕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사시대를 마무리 합니다.

 

왜 왕을 요구했는가?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끝내고 이웃 나라와 같은 왕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이스라엘에 왕권이 발생한 요인으로 가장 널리 인정받는 것은 중앙집권화 된 블레셋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은 기원전 1150년 이후에 남부 해안평야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하였으며 1050년에는 산악지대의 이스라엘 중심부에까지 심각한 위협을 가해왔습니다. 성서에서는 사무엘상의 초반부부터 블레셋의 침략과 전쟁을 묘사합니다. ‘블레셋이 사사기에서 131, 사무엘상에서 무려 492, 사무엘하에서 99번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블레셋의 존재가 이스라엘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은 상호반목하는 가나안 도시국가들과는 달리 과두지배 체제의 잇점이 있었고 철제 무기와 기동성있는 공격력을 모두 갖추고 산악지대에서 효과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습니다(삼상 13:19-20).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할 때에 칼이나 창이 없었으며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있을 정도로 블레셋은 월등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삼상 13:22).

기원전 10세기부터 청동보다 철이 더 중요한 금속이 되었습니다.[각주:3] 팔레스타인은 철 광석이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고 주요 철 생산지였던 길르앗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상부 갈릴의 하르 아디르(Har Adir) 유적지의 기원전 11세기 요새에서 상당히 잘 보존된 강철 곡괭이가 상수리나무 손잡이가 달린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물은 강철로 만들어진 가장 초기의 유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되는 다아낙에서 발견된 철 유물들에는 낫, 쟁기 끝, 칼날, 화살촉, 갑옷비늘 등이 있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13:20의 역사성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10-9세기 블레셋 중심지 가드에서도 철기 작업장으로 보이는 장소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다. 이러한 금속 작업장은 블레셋 도시 중 오직 가드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사무엘상 13:19-22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철공이 없던 이스라엘이 철 도구를 고치기 위해 찾았던 블레셋 사람들은 가드에 살았을 것입니다.[각주:4]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이스라엘 운동(Israel Movement)이 군주제 여명기에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무브먼트를 위해 전향한 잡다한 민족들은 사회경제적 평등화와 공유라는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시 국가를 탈출할 때의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이 막상 정착 생활이 안정되면서 흐릿해져버렸습니다. 또한 특정 지역과 특정 가문들 특별히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유다 가문의 부와 영향력이 증대된 것이 요인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의 권력 남용(삼상 2:12-17), 사무엘 아들들의 뇌물수수(삼상 8:1-3)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지도층들의 비윤리 행동이 평등주의 이념을 서서히 잠식해 버립니다. 또한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포도주에 취한 줄 착각할 정도로 둔탁했으며(삼상 1:9-14), 여호와 가 사무엘을 부를 때에도 알아채지 못합니다(삼상 3:2-6). 사무엘상 3:1은 엘리 시대의 여호와 신앙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또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갔을 때, 사백 명 가량이나 부랑자들을 모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무브먼트가 온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울 일가와 다윗 일가의 분쟁은 비교적 평등한 힘을 나누어 가졌던 12지파의 구조가 에브라임과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두 세력으로 양분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무브먼트는 실패해 버립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왕이 없던 시기의 혼돈을 포로기 편집자의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Tomas Romer 외 6인, 「구약신학 연구동향」, 민경구 역 (서울: CLC, 2016), 75. [본문으로]
  2. 삼상 1:1에서 사무엘은 에브라임 사람이었으나 역대상 6:16-28에서는 레위 사람으로 나온다. [본문으로]
  3. Phillp J. King, Lawerence E. Stager, 「고대 이스라엘 문화」, 임미영 역 (서울: CLC, 2016), 237. [본문으로]
  4. 임미영, 기원전 10-9세기 블레셋 중심지, 가드 : 최근 텔 에 사피(Tel es-Safit)성벽발굴을 중심으로, 「구약논단」 2017(23), 2017, vol.23, no.2, 통권 >64호: 222-2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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