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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구약 일반

6. 역사로서의 성서(2)

by 에르고니아 202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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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참으로 놀랍게도 이집트 사람들은 기록된 역사책을 한권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역사를 다룰 때는 기원전 3세기 프톨레미 시대의 이집트 제사장인 마네토가 남겨놓은 이집티아카(Aegyptiaca, 기원전 280)가 기본이 되지만 불행이도 원래 작품은 남아있지 않으며, 후대 작가들이 인용한 단편의 형태만 남아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자신의 설명을 왕조들로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왕조들은 동일한 수도에서 다스리던 가문들과 통치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역사가라면 누구나 마네토가 남긴 자료를 넘어서서 비문 자료들과 다른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충분히 활용해야할 것입니다.[각주:1]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생지인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도 비슷합니다. 베로소스(Berosssos)가 기원전 280-270년에 메소파타미아 최초의 역사기록인 바빌로니아카(Babyloniaca)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안티오커스 1세의 치세 때 바벨론에서 활동한 벨(마루둑)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저작 또한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고 단지 후대의 저술가들에 의해 인용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의 저작은 마네토의 경우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베로소스는 다양한 설형문자 자료들에 의존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메소포타미아 역사가들은 누구나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비문 자료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베로소스의 저술을 연구해야 합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최초 역사 기록은 훨씬 후대의 기록이며 그 원본은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완벽한' 실제 역사는 어떠했을까요?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

사기(史記)는 사마천이 저술한(기원전 109-91) 중국의 역사서로서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역사서 24개 가운데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힙니다. 본기(本紀) 12, () 10, () 8, 세가(世家) 30, 열전(列傳) 70권으로 모두 130권에 이릅니다. 역사서로 뿐만 아니라 유려한 문장으로 되어있기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서술 범위가 무려 기원전 2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말까지로, 신화 속 군주인 삼황오제의 요()까지 서술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1,2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사마천의 사기는 그보다 더 긴 2,000년 전의 이야기도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기의 모든 내용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고 30권입니다.[각주:2] 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했으며 일본의 신화시대부터 기술하고 있습니다. 712년에 저술된 고사기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일본서기로 간주됩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내용 차이는 큽니다.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과 가야의 멸망 등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쪽의 기사가 훨씬 자세하고 관련 내용도 풍부합니다.[각주:3] 그런데 일본서기는 저자를 알 수 없으며 편찬배경이나 경위를 설명하는 중요한 서문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자료와 비교해보면 오류가 많이 드러나며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은 중국보다도 더 강력한 나라입니다. 진구 황후(神功皇后)가 음부를 돌로 막아 출산을 멈추고는 일엽편주를 타고 와서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였다는 이야기, 게이타이 천황(465-531)의 사망시기가 고사기일본서기에 세 가지 다른 설이 전해지는 것, 일본의 역사 연대를 끌어올리려고 역사기록을 120(2갑자)가량 앞당겼다는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가설 등 의문이 많은 책입니다.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각주:4] 백제의 칠지도 명문[각주:5] 그리고 특별히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에게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실제 역사로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이런 한계를 갖고 있다고, 사기일본서기를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을까요?

 

삼국사기와 한국 고대사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역사서는 삼국사기입니다. 1145(고려 인종 23)에 김부식 등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때는 신라가 멸망한 지(936) 200여 년 뒤, 삼국사기의 대상 시기 중 가장 이른 기사인 혁거세의 신라 건국(기원전 57)과는 1,200여 년 뒤의 기록입니다. 이후에 1281(충렬왕 7)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에 의해 삼국유사가 쓰입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머리말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신 김부식은 말씀 올립니다. 옛날 나뉜 나라에서도 각각 사관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중략…….생각건대 우리 해동 삼국은 그 지나온 연수가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나라의 역사책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에 늙은 이 신하에게 명하여 편집하도록 하셨으나,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족할 뿐이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중략…….그러나 신과 같은 사람은 본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또 깊은 식견이 없으며, 나이가 늙어 정신이 날로 혼미해지고, 비록 부지런히 책을 읽어도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리며, 붓을 잡는데 힘이 없고, 종이를 펴 놓으면 글이 내려가지 않습니다.…….중략…….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 폐하께서 신이 뜻만 클 뿐 소략하게 처리한 것을 헤아려주시고 함부로 만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비록 명산의 사고에 길이 간직할 만한 책은 못 된다 하더라도 장단지를 바르는 데에 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질구레한 망령된 뜻을 굽어 살펴주소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관련 사서들은 모두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합니다. 특별히 삼국사기는 국내에서 편찬된 가장 오래된 사서이자 한국 최초의 정사(正史)로서 한국 고대에 대한 국내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으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그렇지만 고구려·백제·신라만을 기술하여 가야와 발해는 제외 한 점, 삼국의 건국 초창기 모습이 지나치게 발전된 모습으로(중앙집권화) 서술된 점, 무엇보다 대상 시기와 편찬 시기의 차이가 큰 점은 역사서로서 약점을 지닙니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내용 중 3세기까지의 기록(‘초기 기록’)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내용이나 상호 모순, 당대에 작성된 여타의 기록(금석문, 삼국지동이전 등)과 상이한 내용 등으로 인해 논란이 됩니다.[각주:6]

 

몇 가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자체 모순

탈해왕의 출생연대 : 기원후 57년 임금이 될 때의 나이가 62세이므로 출생은 기원전 5. 탈해가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했던 때는 기원전 19(혁거세 39).

아달라왕의 후손 : 아달라(재위 154-184, 박씨)에게 아들이 없어 벌휴(석씨)가 왕이 됨. 그러나 신덕왕(53대 왕, 재위 917-924)이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나옴.

대무신왕의 출생 연대 : 기원후 14년에 11세로 태자 책봉(기원후 3년 출생).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인데 그녀는 기원전 18년에 시집와서 이듬해(기원전 17)에 사망.

고구려 3대왕의 관계와 나이 : 6대 태조왕은 53년에 7세의 나이로 즉위(46년 출생), 7대 차대왕은 146년에 76세의 나이로 즉위(70년 출생), 8대 신대왕은 165년에 77세의 나이로 즉위(88년 출생). 셋은 동모제(同母弟)이며 아버지는 유리왕(2대 왕)의 아들 재사. 유리왕은 18년에 사망. 재사가 18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70세에 신대왕을 출생한 것. 이들의 엄마가 15세에 태조왕을 낳았다 해도 57세에 신대왕 출산.

백제의 시조 : 백제본기 본문에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고 온조가 백제를 세움(하남). 세주에는 비류·온조가 우태의 친아들로 우태 사후 어머니(소서노)가 주몽에게 시집가서 주몽의 양자가 되었으며 비류가 백제를 세움(미추홀).

마한은 백제에 의해 기원후 9(온조왕 27)에 멸망했는데, 61년 마한의 장수가 신라에 항복하고, 121년과 122년에는 고구려를 도와 한나라를 공격. 후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편찬자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함.

 

여타 자료와의 충돌[각주:7]

관구검의 침입 시기 : 삼국사기에는 246(동천왕 20) 1. 삼국지에는 2441(동이전), 244·2452(관구검전), 2461(삼소제기)로 기록. 1906년 발견된 관구검기공비에는 244~245년으로 기록(추정). 비에 의하면 2461회는 아님.

3세기 백제와 신라의 영역 : 삼국사기에는 1세기 중반부터 백제와 신라의 접촉 기사가 나오며(63) 이후 두 나라의 전투 기사가 자주 등장. 양국은 1세기 중반부터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 그러나 삼국지동이전에는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이 마한 54(진한 12·변한 12국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함. 이 중 마한의 백제국(伯濟國 : 한강 일대), 진한의 사로국(斯盧國 : 경주)이 각각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전신으로 파악됨. 이에 따르면 3세기에 백제와 신라는 인접한 세력이 아니었고(심지어 백제·신라도 아니었음) 한반도 중부 이남에 다양한 국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와 신라의 전투 기록은 성립할 수 없음.

삼국 초기의 정치체제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국가형성 초기부터 강력한 왕권이 행사된 것으로 나옴. 그러나 삼국지동이전에는 왕권이 미약한 모습으로 서술됨. ()라는 단위정치체가 존재했는데, 국가 중대사가 부의 협의에 의해 결정되고 왕도 가장 유력한 부의 부장일 뿐.[각주:8]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 동안, 백제는 678, 신라는 992년의 역사를 누렸습니다. 이 세 나라의 역사 기간은 모두 2400여년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전체 권수는 50권 체재에 목판 80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평균적으로 보아 목판 한 장에 3년의 역사가 담겼다 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경우는 목판 한 장이 무려 10년의 역사를 담당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장구하고도 광활한 역사에 대한 희소한 단서에 불과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분명하다.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 삼국의 역사에 다가서기 위한 가장 유력한 통로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고대로 안내하는 이 창이 너무나 협소하다. 게다기 삼국사기를 우회하여 고대 삼국의 마당에 들어서기에 마땅한 다른 대안은 없다.”[각주:9]

또 목판으로 된 삼국사기에는 오자가 적지 않습니다. 김부식 등의 저자들이 종이에 올바르게 글을 썼다하더라도(처음 기록에도 완전히 오자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목판 작업을 거치면서 오자가 상당히 많아집니다. 당시에 목판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자를 제대로 읽거나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작업 도중에 오류가 생겼을 것입니다.

또한 삼국사기가 처음 간행된 시기는 김부식이 죽은 의종 5(1151)이전일 가능성이 높으며 판각 작업은 경주 지방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초간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일부의 판목은 복간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활용되었습니다. 마지막 판각은 중종 7(1512)에 경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보통 정덕본또는 임신년 간본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영인본과 활자본들은 이 정덕본을 원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초간본에 비해 무려 360년이 지난 것입니다.[각주:10]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 의해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기록한 거의 유일한 삼국사기는 역사책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게 될까요?

 

 

만들어진 고대

성서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가들에게 고대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입니다.[각주:11] 이를테면, 발해는 698-926년까지 230년 동안 북으로는 러시아 연해주, 중국 흑룡강성과 길림성, 남으로는 북한의 북부에 걸쳐있었던 광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발해인 자신에 의한 기록이 거의 없기에 중국이나 일본의 자료를 참고해서 재구성합니다.

발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첫째, 각 나라가 발해를 어디에 편입시키는가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독립된 국가로 보지 않고 한민족(漢民族당 왕조의 소수 민족 국가·지방 정권으로 보기에 중국 역사에 수용시킵니다.

구소련은 발해를 역시 말갈족의 국가로 보면서도 말갈인은 기원이나 언어를 달리하는 다양한 종족이 수천년의 형성 과정을 거쳐 발해인으로서 단일 민족으로 형성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발해 역사가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 여러 종족의 형성과 발전사 속에 자리 매김되어 있어서 발해가 극동 지방 여러 민족의 역사에서 그들 자신이 만든 최초 국가로 간주합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발해의 지배 집단을 고구려족,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기에 민족·문화적으로도 오늘날의 한민족(韓民族)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민족의 성립은 역사상 상당히 이른 시기로 상정하고(북한은 기원전으로 둔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우리민족이었기에 고구려의 발해도 우리민족으로 봅니다.

일본도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만연하기에 우리나라 연구와 친근감을 줍니다.

 

둘째, 그런데 또 다른 논란은 발해 구성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말갈족은 역사적으로도 그 분포나 구성이 단순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고구려 멸망으로 인해 종래의 말갈족 일부가 해체되는 한편 새로운 부족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곧 이전에 고구려의 종속 아래에 있던 말갈족 사이에서 변동이 일어났으며, 더구나 다 같이 말갈이라 불리면서도 고구려 멸망을 전후해 속말부(粟末部)의 말갈족과 북부 지역의 말갈족 사이에는 문화·민족적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남부 지역의 중심적 말갈족 곧 속말부 말갈족은 예부터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복속해 있던 예(), 동옥저(東沃沮)에 연원을 두는데 고구려 시대에는 백제, 신라, 당과의 대외 전쟁에서 고구려와 함께 군사 활동을 했던 민족이며 고구려에 종속했던 이들이야 말로 발해의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북부 말갈족은 삼국 시대에는 읍루(挹婁), 북위 시대에는 물길(勿吉)이라 불리던 이들로 당나라로부터 말갈이라고 불리기는 했으나 말갈족 사이에는 문화·민족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각주:12]

 

셋째, ‘민족개념 자체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것은 발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논쟁입니다. 민족 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역사와 관련된 기록들

역사로서 가치가 있는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역사-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기원전 488-428)역사는 모두 9권으로 되어 있으며, 기원전 49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그리스어 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를 거쳐 오늘날 'history’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서양 최초의 역사책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기원후 1300년의 것입니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Thucydides, 기원전 460-400)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기원전 5세기에 일어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다룬 책으로서 남아있는 사본이 8개인데, 가장 오래된 사본이 10세기의 것입니다.
  • 갈리아 원정기- 기원전 58-51,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에 대한 기록물인 갈리아 원정기의 사본은 10개이며, 가장 오래된 사본은 10세기의 것입니다.
  • 로마제국의 역사- 로마의 타키투스의 로마제국의 역사, 116년 기록, 원본은 없고 1-6권은 850년 사본 하나, 11-16권은 11세기 사본 하나, 7-10권은 전혀 없습니다.
  • 유대 전쟁사- 신약성서 전후 시대의 정치와 시대상을 잘 알려주는 책으로서 유대인 장군이었다가 로마에 투항한 요세푸스가 기원전 1세기에 기록. 기원후 10-12세기의 사본 9개와 약간의 번역본이 전부입니다.
  • 자료들-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관한 6세기 이전의 어떠한 문서 자료도 없으며, 구약 성서에 아람 또는 시리아로 자주 등장하는 북이스라엘 북쪽의 다메섹 왕국의 영토에서 발견된 아람어 비문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기원후 8세기 카롤링거 제국의 비문도 전혀 없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역사가는 마땅히 진실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역사가는 기적과 신의 간섭에 기반을 둔 초자연적 해석을 멀리하고 사실적이고 확실한 근거가 있는 증언들만 활용해야 하며 객관적인 서술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그리스 역사 문서가 진실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어느 역사가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심지어 역사가들조차도 역사적 진실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역사적 판단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젠킨스(Keith Jenkins)는 역사란 연구대상인 과거를 다루는 점에서만 공통점을 가질 뿐이며 하나의 역사가 아닌 복수의 역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각주:13]

어떤 기록도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단 하나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여러 가지 사건들과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는 사라져버렸으므로 실제 과거를 완벽하게 검토할 수 있는 설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다른 설명에 의해서만 검토할 뿐이다. 다른 해석들을 변형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게 만든 정확한 텍스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역사책이든 단독으로 완벽하게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는 자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란 오늘 읽는 어제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성서 자체는 순수한 역사책이 아닌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신앙의 경전입니다. 성서의 역사성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비교분석하는 작업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성서의 역사성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의 역사책들과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별히 오늘날 여러 종교들이 사용하는 경전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성서의 역사적 객관성은 압도적입니다. 성서의 역사성에 객관성이라는 칼날을 대는 것처럼 여타의 종교 경전에도 같은 칼날을 대면 살아남을 경전은 단 한권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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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son F. Rainey and R. Steven Notley, 「성경 역사, 지리학, 고고학 아틀라스」, 강성열 역 (서울: 이레서원, 2010), 53; Iain Provan, et al., 김구원 역 (서울: CLC, 2013), 131. [본문으로]
  2. 「일본서기」는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itemId=ns [본문으로]
  3. 연민수 외 6인, 「역주 일본 서기 1」,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3), 46-7. 「일본서기」의 가치는 한반도 관련기사가 풍부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데, 진정한 가치는 「일본서기」가 비록 신화시대까지 기술하기는 하지만 고대인에 의해서 편찬된 고대의 사서라는 점에 있다. 범위를 넓히면, 「일본서기」 다음에 편찬된 「속일본기」를 비롯하여 6국사라는 사서가 있어서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일본학자들이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 [본문으로]
  5. 「일본서기」를 근거로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하는 칼, 실제는 왜왕에게 하사된 칼. [본문으로]
  6. 양인호, “역사학도의 구약 읽기 : 󰡔삼국사기󰡕 초기기록과 구약성서” 2015년, 에르고니아 강의안. [본문으로]
  7. 대표적인 자료는 진수의 󰡔삼국지󰡕. 진(晉)나라 진수(233~297)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책. 위·촉·오 3국 정립 이전부터 진의 삼국 통일까지 약 1백여 년 동안의 기록. 외국(이민족)에 대한 정보는 열전에서 서술함. 한국 관련 기록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에 서술. 편찬 연대가 280~289년 사이로 추정되므로, 󰡔삼국지󰡕 동이전을 통해 3세기 후반 한반도와 만주의 사정을 알 수 있음. 이 밖에도 몇몇 금석문을 통해 확인 가능. [본문으로]
  8. 고구려에서 부는 자체적인 관료체계, 군사조직을 가지면서 영역과 백성을 다스림. 왕권은 부의 백성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영역에서만 영향력 행사. 신라의 경우, 왕이 부의 소속으로 나오고, 국왕을 포함한 7명의 왕들의 공론(共論)으로 주요 사안이 결정됨(「냉수리비」). [본문으로]
  9. 이강래, 「삼국사기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2017), 25-26. [본문으로]
  10. 이강래, 「삼국사기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2017), 135-136. [본문으로]
  11. 기경량, “한국사에서 민족의 개념과 형성 시기,” 「사계절」, 한국고대사 연구의 시각과 방법 (2014), 221-246. [본문으로]
  12.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서울: 도서출판 삼인, 2001), 110-119. [본문으로]
  13. Keith Jenkins,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최용찬 역 (서울: 혜안, 1999), 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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