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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구약 일반

13. 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by 에르고니아 202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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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노트

 

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고고학과 관련하여 성서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겠습니다.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다양하겠으나 간략하게 다섯 개 정도로 나누어 보면,

첫째, 성서의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성서외의 모든 증거들은 무시한다.

둘째, 성서의 본문을 대부분사실로 받아들이고 성서 외적인 증거들도 약간 고려한다.

셋째, 성서의 본문과 외적인 자료들을 모두 선입견 없이 접근한다.

넷째, 외적인 자료들에 의해 증명되지 않은 성서의 본문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섯째, 성서 본문과 거기에 관련된 자료를 일단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고대 근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성서의 역사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을 최대주의자(Maximalist)라고 부릅니다. 성서를 신뢰할만한 1차 자료로 보고 그 밖의 자료는 성서에 대조하여 참조할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구약 성서의 역사성이 필수사항이 되기에 출애굽, 가나안 땅 정복, 다윗 왕조 등의 사건이 성서의 서술과 같은 방법으로 실제로일어났는지가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성서를 후대의 작품으로 보고 성서의 역사성을 조금만 인정하는 계열의 학자들을 최소주의자(Minimalist)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고학 등과 같은 성서 바깥자료를 1차 자료로 봅니다. 물론 어느 견해나 의견을 ‘~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몇 몇 학자들만 살펴보겠습니다.[각주:1]

 

독일 학자

알브레히트 알트(Alt)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정착)에 관해 쓴 1925년 논문에서 평화적 정착 모델 혹은 내부적 유입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묘사한 것처럼 짧은 기간의 정복전쟁에 의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롭게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입니다.

마틴 노트(Noth)는 알트의 수제자로 1930년대에 사사 시대(기드온, 삼손이야기가 나오는 사사기의 배경) 동안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델을 발전시켰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12부족 연맹에 대한 성서 기사를 암픽티오니라고 부르는 후대의 그리스 부족 연맹과 관련하여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가나안의 세겜에서 모인 계약회의(여호수아 24)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선을 위해서 느슨하게 묶인 성스러운 연합체, 중앙 성소에서 정기적인 언약-갱신 의식을 집행하면서 유지해갔다는 주장입니다.

맨프레드 바이페르트(Weippert)는 꼼꼼하게 고고학적인 근거를 조사해서 알트와 노트의 이론을 옹호하였으며,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목민이었다고 결론내립니다(오늘날, 초기 이스라엘의 기원이 농경민인지 유목민인지 하는 문제는 첨예한 논쟁거리입니다).

 

미국 학자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올브라이트 학파를 이루었으며, 19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성서고고학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등의 기사들을 전반적으로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제자 G. 라이트(Wright)1950-70년대에 한창이었던 성서 신학운동과 짝을 이루어서 성서 고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존 브라이트(Bright)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존 브라이트의 이스라엘의 역사4판을 편집한 브라이트의 제자 윌리엄 브라운은 스승인 브라이트의 보수적인 주장을 대부분 수정해서 고고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개정합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전혀 다른 방향의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인류학과 사회과학적인 방법으로 무장한 노만 갓월드(Gottwald)는 초기 이스라엘의 기원을 가나안 정복 전쟁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일어난 일종의 농민 혁명을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도시 국가의 착취, 불평등, 노예 제도 등의 불합리성이 농민들로 하여금 기존 체제를 거부하게 했다는 다분히 유물론적인 주장입니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부분 수정했습니다.

체이니(Chaney), 할펀(Halpern), 쿠트(Coote) 등의 학자들은 성서가 묘사하는 단기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부정하며, 대체로 초기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가나안 민족 또는 이주민들과의 혼합민들 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데버(William G. Dever)는 성서의 역사성을 대부분 부정하는 최소주의자들에 맞서서 매우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저명한 고고학자입니다. 성서의 각종 사건들에 관한 고고학 증거는 성서의 역사성을 상당부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고 보며 고고학을 통해 역사적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으로, 최소주의자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같은 학자들과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이스라엘 학자

벤자민 마자르(Benjamin Mazar)는 현대 이스라엘 성서 역사연구에 있어서 1인자였으며, 미국에 올브라이트가 있었다면 이스라엘에는 마자르가 있었습니다. 마자르는 초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걸려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또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헷, 히위, 여부스 족속과 같은 서로 다른 인종의 혼합체라고 봅니다.

이가엘 야딘(Yadin)은 마자르의 제자로서, 사해문서를 발굴하고 편집하는 데 참여했고 하솔을 발굴했습니다. 또한 마사다 요새와 바르 코흐바 반란 때의 편지, 그리고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 문을 발굴하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에서 고고학 발굴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이 반() 유목민으로서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수많은 가나안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정복했다고 결론내립니다.

요하난 아하로니(Aharoni)는 마자르의 또 다른 제자로, 기본적으로 아하로니는 전반적인 침투 과정을 옹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알트의 노선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곳에 머물러 살던 이스라엘인들이 요단강의 양편에 있던 산간 지대의 여러 장소들을 파괴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과거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중요한 고고학적인 탐사들은 주로 아하로니의 영향에 힘입은바 큽니다.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는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의 고고학자입니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이 여러 면에서(집터 분포와 위치, 토기류의 성분, 경제 사회적 구조와 같은 부분) 가나안 문화와 다른 점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가 비록 성서에서 묘사하는 것 만큼의 웅장한 규모는 아닐지라도, 핑컬스타인이 주장하는 촌락 정도로 작은 규모는 아니었으며 강력한 통치력이 뒷받침하는 도시 규모였다고 주장합니다.


 

  1. William G. Dever, Who Were the Early Israelite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12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