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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구약 일반

4. 문학으로서의 성서

by 에르고니아 2020.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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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기독교는 성서의 바탕 위에 서있으며 교회는 성서의 열매이고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읽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환경과 문화 안에서 성서를 읽기에,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결과를 달리합니다. 때때로 성서의 어떤 부분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해 보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들 스스로도 과학적 실증주의의 물결 속에서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성서 본문을 발견하는 상황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하기는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이미 수천 년 전에 확정된 성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침반이 되어 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시하는 놀라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성서를 읽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보통 큐티(QT, Quiet Time)라고 하는 방법으로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의 도움이나 주석서 없이 홀로 성서를 읽고 해석합니다. 위로와 평안을 주는 메시지, 고민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자기의 삶에 적용하기 위한 성서 읽기입니다.

둘째, 성서와 여러 도움이 되는 책들을 함께 읽으며 성서의 역사와 배경을 배웁니다. 큐티가 주관적인 성서 읽기라면, 이것은 비교적 객관적인 성서 읽기입니다. 성서 본문뿐만 아니라 성서의 배경, 저자, 이스라엘과 연관된 역사적 사건 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연 과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들과 성서를 비교 분석합니다. 더 깊은 성경 공부를 위해, 성서가 역사성과 사실성이 없는 비과학적인 책에 불과하다고 공격받을 때, 또는 선교와 전도를 위해 성서의 신학적 논증을 보증할 필요가 있을 때 쓰는 방법입니다.

셋째, 교회와 사회 속에서 성서 읽기입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영성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주관적 성경읽기와 객관적 성경 읽기가 끝나고 난 뒤, 때로는 읽는 도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에게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위의 세 가지 성서 읽기의 방법에 비추어 문학, 역사 그리고 신학으로서의 성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문학으로서의 성서

성서가 문학일까?

성서는 문학적 기법과 방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각주:1] 왜냐하면 문학적 기법이 들어감으로써 독자들이 흥미와 감동을 느껴 성서를 계속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적 기교와 기술이 없는 기록은 역사적 사건들만 나열한 기록 책에 불과하기에 거기에서는 어떠한 감흥이나 영적 감동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교차대구, 반복, 대칭의 구조로 구성되어 구조적으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각주:2] 사사기의 기드온과 삼손 이야기, 룻기, 에스더, 요나서 등은 여러 문학적 기교를 사용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당시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서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그들의 상황에 동감하게 해 줍니다.. 시편은 비유, 탄식, 찬양, 감사의 문학적 기교를 포함하며,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각 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 등은 역사기록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예언서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복음서에서 나사렛 예수는 여러 비유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이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네 명의 기록자들이 저마다의 문학적 기교를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룻기, 욥기, 에스더, 아가서 등은 일종의 드라마입니다. 이러한 성서들은 실제 있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실로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에서 있음 직한 일들을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기---결 또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식이 분명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와 감동을 극대화시켜줍니다.

성서의 모든 부분이 역사는 아닙니다. 이는 조금 오해할 수 있는 말인데, 실제 일어났던 것을 사실로 기록한 역사가 아니라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거나 심청전이나 홍길동전이 소설이라는 것 때문에 그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소설은 역사 기록은 아니지만 당시의 시대상과 문화를 문학 기법을 통해 감동적으로 전달해줍니다.

원래 구약 성서는 세 개의 큰 묶음으로 되어있는데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라는 이름으로 ‘Torah Nebhim Ketubhim’(토라, 느비임, 케투빔)입니다. 율법서라고 부르는 토라오경으로 흔히 모세 오경이라고 합니다. 느비임은 예언서(또는 역사서)로서, 전기예언서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가 들어 있고, 후기예언서에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소예언서 12이 들어 있습니다. ‘케투빔’(성문서)에는 시편’ ‘잠언’ ‘욥기와 같은 시와 지혜서인,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기라고 하는 다섯 두루마리, 이 밖에 다니엘서에스라-느헤미야기가 있고 맨 마지막에 ‘역대기서’가 있습니다. 예언서(역사서)들과 달리 오경이나 성문서 등은 처음부터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에 중점을 둔 성서가 아닙니다. 이 성서들은 교훈과 감동을 주기 위한 문학적 기록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 썼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역사서로서의 잣대를 구약 성서 전체에 적용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라와 케투빔의 기록자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있음 직한 사건들을 자신들의 신앙적 관점으로 활용하고 각색하여 신 여호와의 자비와 전능함에 대한 감동과 영적 감흥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것의 결과물이 오늘날까지 놀라운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문학적 기교와 기법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는 성서는 수많은 예술 작품들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림, 조각과 같은 미술뿐만 아니라, 성서의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활용한 영화나 뮤지컬, 각종 음악,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 등 모든 예술 분야가 도움을 받습니다. 이는 예술로서의 성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성서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수많은 독자들에게 매력을 주는 이유입니다.

 

성서를 계속 읽게 하는 힘

또한 성서의 문학적 기교는 매일의 고된 일상에서도 성서 읽기를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곧 성서를 읽는 것이 흥미와 감동을 주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속에서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감동적인 사건이나 특정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학적 기교가 없다면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서 이야기는 아무런 감동이나 흥미 없이 교훈과 신앙을 억지로 강요하는 듯 한 느낌을 주는 고문서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학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계속 읽히고 전해지기를 원하는 동기를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서를 기록한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신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감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를 원했습니다.

진리와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성서 속에는 원래 성서의 기록자가 경험한 내적 현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문학적 기교를 사용해서 현실의 관념을 반영하고 굴절하며, 역사를 초월해서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성서의 역사적 배경 지식 없이도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서 본문 자체의 힘은 성서의 본문을 단순히 글자로 읽는 것을 넘어서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모세, 다윗, 솔로몬, 베드로, 요한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주어졌던 수 천 년 전의 사건과 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늘날에도 성서를 읽는 이들의 마음에 새겨집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듯이 우리는 거룩함에 압도됩니다. 여호수아의 담대함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힘이 되고, 사무엘의 성결함은 내 삶을 지배하며, 솔로몬의 지혜는 내 발의 등불이 됩니다. 에스더와 함께 죽음을 각오한 결심을 할 수도 있으며, 욥의 비탄과 절규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리 삶의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우며, 다시스로 가는 요나의 배에 함께 타고 있는 나를 봅니다. 성서 속의 여러 사람들이 성서에서 걸어 나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으며, 신 여호와를 믿도록 이끌며, 자신들의 신앙 여정에 동참하기를 강권합니다.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만났던 여호와가 성서를 통해서 우리와 대화하고, 어깨에 손을 얹어 힘을 더하며, 손을 잡아 진리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서 읽기는 모든 구절들이 나에게 직접 들려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전제 위에 신이 나에게 계시하며 성령을 통해 그 뜻을 해석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서의 글자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시각으로 읽고, 느끼고, 받아들이는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단순히 역사적인 자료들을 읽어 내려가는 수단으로 성서 본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발견한 좋은 구절들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나에게 유리한 구절들만 뽑아서 적용하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탁월한 문학적 기교를 포함한 성서는 단지 복잡하고, 재미있고, 흥미 있는 언어의 구조를 사용하기 때문에 지속되고 살아남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각주:3] 성서가 지닌 심미적인 면들과 수사학적인 전략들은 그것들이 이루어 놓은 영향들과 청중들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힘 때문에 선택되고 남겨집니다. 성서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물리적인 생존이 아니라 모든 성서 비평가들(문학 비평가들, 역사가, 신학자)이 인정하는 것처럼, 문학적 감동을 지닌 힘의 본질을 실제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성서

문학적 기교를 활용해서 성서는 지속적으로 선택되고, 다시 읽히고, 다시 번역되고 해석되어갑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야기, 다윗과 솔로몬, 선지자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며 메시아 예수이며, 거기에 응답하는 한 무리의 집단이나 민족일 것입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성서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성서 밖에서 문학적 기교와 상상력의 힘을 동원하여 독자들을 흥분시키고 깊은 감동을 주며 새로운 도전에 맞서게 합니다. 따라서 성서를 읽기 위해서는 성서의 본문과 끊임없는 대화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서는 문학이고 동시에 예술입니다. 예술이 아닌 문학만큼 지루한 것은 없으며 예술로서의 문학만큼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학적 기교를 사용하는 성서가 감동, 설화, 허구를 향한 발걸음은 아닙니다. 성서는 자유롭게 작성한 순수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라는 도구를 사용해 사상과 가치를 표현하는 문서입니다. 성서는 문학적 기교를 통해, 흘러가 버린 과거가 아닌 뚜렷이 보이는 역사적 과거에 눈을 돌리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하고 결정적인 순간들이 성취되었던 때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는 역사로부터 도망가거나 탈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스스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재촉합니다.

성서 속의 인물들이 자기의 상황과 시간에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만났듯, 성서를 읽는 모든 이들도 지금, 여기에서 여호와를 만나게 됩니다.


 

  1. William G. Dever, 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 When Did They Know It?, 18-19. 첫째, 문학은 읽고 쓰기가 어려웠던 고대 사회에서 지적 상상력을 가진 몇몇 창조적인 사람들의 작품이다. 문학은 엘리트들에 의해서 엘리트들을 위한 것으로 쓰였다. 둘째, 성서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때때로 그것이 ‘역사화’되었다 해도 허구성을 포함하기도 한다. ‘문학은 과거를 어떻게 실제화했는가’를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셋째, 문학이 현실을 직접 반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기술적인 의도’를 품고 있다. 이 의도는 원래 성서 저자가 경험한 ‘내적 현실’로서 이는 현실의 어떤 관념을 전달하려는 의도이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외부(현실) 세계를 반영한다. 또한 현실의 관념을 반영하고 굴절하는데 역사를 초월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를 말살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성서 구조의 질서와 시각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엄원식, 「히브리 성서와 고대근동문학의 비교연구」 (서울: 한들출판사, 2000)을 보라. [본문으로]
  3. Keith W. Whitelem, Between History and Literature, 194-19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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