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15: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주의 만찬, 성찬식, 유카리스트
성찬식,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발 씻는 장면만 나온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나온다.
초기에 기독교인들은 식인을 한다고 오해를 받았다. 주의 만찬 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했으니,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어린이를 몰래 잡아다가 먹는다는 소문이 생길 정도였다.
3-4세기부터 정교해지고 논리적. 포도주를 한두 방울 떨어뜨리거나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 빵을 직접 굽는 사람은 빵을 태우는 일이 절대로 없었어야 함
화체설
12세기에 처음으로 화체설이라고 불린 이 교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몇몇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신봉하고 있으며, 비록 빵과 포도주의 외형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현존한다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문자적 진리를 수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3~15세기에 스콜라 신학자들이 잘 정의한 이 화체설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63) 문헌에 수록되었다. 신비스러운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실재임재에 대한 신앙은 스콜라적인 형식을 갖추기 이전에 이와 유사한 용어로 그것을 설명했던 교부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20세기 중반 몇몇 가톨릭 신학자는 이 이론에 대해 수정된 견해를 내놓았는데, 실체의 변화에서 의미의 변화를 강조했다. 이들은 화체설이라는 용어 대신 의미변화(transsignification)와 목적변화(transfinalization)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965년에 교황 파울루스 6세는 그의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라는 회칙에서 화체설 교리와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공포했다.
술 좋아하는 신부님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좋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신부님은 포도주가 절대로 남지 않게 양을 조절.
공재설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비판하며 화체설에 입각한 교회의 미사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비판과 그 개혁은 미진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화체설을 비판하면서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그 분이 “실제로” 임재(Real Presence)하시고 “육체적으로” 임재(Physical Presence)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장 깔뱅은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상징설
신자가 믿음으로 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 “간주”(Regard)하는 것이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2,000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이며,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그 시점과 그 현장에서 그 분을 영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단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할(Symbolize)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례란 단지 형식이고 상징일 뿐이라는 성례형식주의(Sacramentarianism)
예수님에게 최후의 만찬은 어떤 뜻이었을까?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만찬
어느 종교가 종교의 창시가의 죽음을 기념하겠는가!
만찬을 먹는다는 것은 죽음을 기념하는 것, 그리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주님을 뵈올 날이 더 가까웠다는 것. 주님을 만나 내 삶에 대해 심판 받을 날이 한 해 한해 다가온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바로 죽지는 않았다. 사실 몇 백 살이나 살았으니 그것은 거짓말이었는가? 930년을 살았다.
창세기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아니다 비록 몇 백 살을 살았다해도 결국은 죽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이면 죽는다. 밥은 한 달 이상 안 먹어도 살수 있다지만 몇 년씩 안 먹고는 살 수 없다. 먹어야 산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먹어도 죽는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결국은 죽는다.
역설적으로 음식을 먹으면 죽는다. 단지 조금 오래 살뿐이다.
먹는다는 것은 죽음에 한걸음 다가간다는 것.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한계가 있는 존재이며 우리 힘으로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
새해가 되면서 한 살 더 먹었다. 기쁜 일일까 슬플까? 슬프다면 내 젊음이 줄어들었다는 것, 무릎이 아프고 흰머리가 더 생기고 눈이 침침해졌다는 것.
기쁘다면 주님을 만날 날이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는 것. 어찌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주님을 뵈옵고 수고로운 십자가를 어깨에서 내려놓고 환상적인 천국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
이웃과 함께 먹는 만찬
먹는 기적. 요한복음의 가나안 혼인잔치, 오병이어의 기적, 베드로와 다시 만나 만찬 등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밥을 함께 먹으며 식구, 곧 가족이 되어간다
나 홀로 예수를 믿는 것은 반쪽짜리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교회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약자들에게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 잘 살게 된 것은 기회가 닿은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가 625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부지런함과 다른 여러 나라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되돌려줘야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머무는 것이 아닌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곧 나는 복의 정류장이 아닌 복의 통로일 뿐이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은 기준 미달일 뿐이니 그저 벼락을 내리시거나 불 심판을 하시면 그만일 뿐이다.
그러나 그분은 친히 오셨다. 그것이 그분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며 하나님의 삶의 태도이다.
예수를 믿는 첫 걸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눈앞에 놓은 음식부터 이웃과 나누어먹는 법부터 배워야했다. 그것이 신앙의 첫걸음이다
혼자 먹는 밥은 진수성찬인들 지겹다.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매끼마다 혼자 먹으면 서글퍼진다. 신앙은 절대 혼자서 자라지 않는다. 함께 더불어 자라야 참 신앙이다.
삶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신앙을 예수를 포기하지 말라! 에서 삶이 조금 나아졌더라도 신앙을 예수를 버리지 말라
치유와 회복
사도 바울이 말하길, 주의 만찬이 뭔가 뒤틀어졌다. 부요한 회원들은 그들이 가져 온 것을 먼저 먹었고 탐욕과 이기심 및 무절제에 의하여 식사를 사적인 만찬으로 바꾸어버렸다. 주의 만찬이 아니라.
내가 가져온 것을 내가 먹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일까?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적 관점에서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원리이고 기독교의 주요한 단면이다.
내가 많이 가져왔어도 나누어 먹으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과,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교제임을 말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수단인 동시에 성도 상호간의 연합적 교제의 수단이다.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함으로써 한 몸이 된다.
영적 식구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회복된다는 것이다. 일주일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시간이며 스트레스를 영적 대화를 풀어가는 시간이다. 수술을 받거나 몸이 아프고 나면 먹는다는 것일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가장 나쁜 죄는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것이고,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으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갈도 좋다고 했다. 먹을 것 같고 치사하게 구는 것이 가장 치사한 짓이며, 먹는 재미가 가장 큰 재미이며, 먹고 살기위해 평생을 뼈 빠지게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만찬을 함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불가분리로 연합된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어야한다. 직접 요리를 하던 외식을 하던 반드시. 그래야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 생긴다.
예수를 믿지 않는 두 가지 이유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 너무 바빠서 안 믿는다.
어떤 사람은 먹고 살만해서 안 믿는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서유럽은 먹고 살만하기에 예수를 믿지 않아도 별 불편이 없다
각종 사회 안전장치가 잘 되어있고, 예수에게 기도하지 않아도 정부가 잘 해준다.
먹고 살기 너무 바쁘면 교회에 출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데, 예수를 마음속으로만 홀로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선을 봐야 상대를 볼 수 있고 자주 만나야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를 만나고 교회에 출석을 해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0.02그램. 하지만
이 쌀 한 톨에 우리의 생명이 담겨있다.
우리는 먹는 것이 몇 칼로리인지 계산하고 먹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몸에 좋아 살찌게 하는 음식이다라는 선전을 한다면 팔릴 리가 없다. 몸에 좋아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야 잘 팔린다.
살쪄 보인다거나 몸이 좋다하면 화를 내는 시대이다.
말라 보인다거나 뭔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라고 말해야 상대가 기분좋아한다.
하지만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음식은 빵이건 포도주건 소중하다. 모든 음식은 주님의 몸과 피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온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며, 그렇기에 음식을 먹을 때는 죄를 짓지 않는지 자기를 살펴야한다. 내가 먹는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피와 살일 수 있으며,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제 배만 불리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새해에는 더 주위를 살펴보자. 내 배가 부름으로 누군가는 배고파해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자.
함께하는 만찬이 진정한 주님의 만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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